소식지 구르다, 대설 편
차와 사람과 이야기 24
고려시대 중기 원종 때부터 무인 집권기를 두루 보냈던 문인 백문절(白文節, ?~1282)은 전북 완주군 화암사(花巖寺)를 들러 시를 적었다. 화암사에 관한 15세기의 기록을 말하자면 “사냥하는 사나이도 이르기 어려운 절이다.”라고 했다. 험준하기 이를 데 없는 이곳에 대해
“어지러운 산 틈에서 놀란 계곡물은 달리는데 몇 리를 찾아드니 점점 깊숙하고 기이하구나. 소나무 회나무는 하늘을 찌르는데 칡넝쿨 드리웠고 첩첩이 쌓인 이끼 미끄러워 발 옮기기 어렵네. 말을 버리고 걸어가니 다리 힘은 빠졌는데 길은 외나무다리 마른 등걸 가지로구나. 한 번 친 성긴 범종 소리 골짜기를 더디 빠져나가고 구름 끝에는 있는 듯 없는 듯 지붕 희미하게 보이네..” <화암사운제(花巖寺雲梯)>
라며 시를 시작한다. 읽다 보면 이윽고 이 시가 차시라는 것을 알 수 있는데, 백문절은 화암사에 다음과 같이 찬사를 보낸다.
“대홈통 타고 가늘게 흐르는 물 손에 받아 입 씻을 만하고
약초밭 채소밭은 가뭄에도 잘 자랐네
부들자리에 차 올려놓고 한참을 얘기하니
비로자나불이 혀 밑으로 헤친다.”
우리나라 차시 중에는 유독 절을 찾아서 스님과 차를 나누며 개인의 감상을 소회를 밝히는 글이 많다. 일종의 문법 같은 것이어서 인간으로 가질 수 있는 고민이나 고통을 차와 불교의 힘을 빌려 이겨낸다는 식이다. 이러한 유의 감상은 고려대에서 조선으로도 이어지는데, 가장 활발했던 때는 역시 고려 중기에서 후기로 넘어가는 이맘때였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이러한 문법적인 구조를 분석하는 일 따위보다 사실 내용이 던지는 의미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렇다. 왜 그런가. 직업으로 수년간 문학을 분석하는 일을 하다 보니 형식미와 구조의 패턴에 묻혀서 정작 느껴야 할 것을 순수하게 느끼지 못하고 의도 이상으로 포장하거나 반대로 인지조차 하지 못하고 넘어가는 일이 다반사였기 때문이다. 문학이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를 되짚어보면, 끝내 자괴감에 빠지거나 허무해지기도 한다. 백문절의 이 시를 처음 읽었을 때 나는 그저 비슷한 수십 수의 패턴 중 하나라고 생각했는데, 공부하던 중 한 문장에 꽂혔다.
‘비로해장설저피(毘盧海藏舌底披)’는 이 시의 중간 부분에 등장하는데 위 인용문 중에는 마지막 줄에 해당한다. 그렇게 험준한 산속에 파묻혀 있는 절 안에서도 삶은 이어지고, 그 삶은 연명이 아니라 복에 가까우며, 그 복은 넘침이 아니라 모자람을 벗 삼아 이루어지는 도(道)고, 그 도는 결국 만족에서 비롯한다는 생각이 다.
차를 마시는 데는 여러 가지 도구가 필요한데, 그 도구의 합을 간단하게 표현하자면 완벽함을 지상에 형상하고 구현해 내려는 노력의 값에 가깝다. 육우가 차와 도를 결합하여 단순한 음료 문화에 의미를 부여한 순간부터 바다 건너 센 리큐가 이를 고도로 정밀하게 정제하여 삶의 지고지순한 가르침으로 인정한 때에도 여전히 유효한 생각이었다. 그렇기에 부들자리 따위에 차를 올려 마시는 일이 정당한 다도에 해당하는지는 사회적 위치와 입장에 따라 다르게 보일 수도 있겠다. 적어도 백문절과 본문의 전면에 등장하지 않는 스님에게는 아니었던 것 같다. 부족함으로 만족을 짓는 삶에는 부들자리가 페르시아 융단 카펫을 대체하기에 모자람이 없기 때문이다. 차의 맛은 잎으로만 결정되지 않기에 순간에 만족할 수 있다면 정취는 깊어지고 맛은 입의 영역을 넘어 정신의 고양감으로 이어진다.
비로자나불은 세계불(世界佛)이니 세상의 이치와 물리 그 모든 법을 뜻한다. 대일여래(大日如來)라는 한자 이름은 그 원리를 쉽게 설명한다. 태양의 빛은 공명정대함을 넘어서 그 뜻과 의도를 인간이 파악하기 어렵다. 생각 같아서는 악한 자에게는 덜 비추고, 선한 자에게는 더 많이 비추어 줄 법도 한데 딱히 그럴 마음이 없어 보인다. 인간의 세계에서 돈이 많고 권력이 크고, 힘이 세면 편하게 사는 법인데 화암사 같이 머나먼 오지에는 그 무엇도 없다. 대신 작은 것에 더 고마움을 느끼고, 한 명의 사람이 반갑고, 가진 것이 많아도 짐만 될 뿐이니 보통의 인간이 보지 못하는 것을 더욱 선명하게 느낄 수 있지 않았을는지. 내리쬐는 빛줄기에 감사함을 느낄 줄 아는 마음이 차 맛을 결정할 수 있다. 예전의 나라면 당최 이해하기 어렵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을지도 모르겠다. 혀 아래를 적시며 침이 고이고 차가 목을 더 태우는 것이 아니라 촉촉하게 젖어 들게 만드니, 백문절의 저 한 때는 세상 부러울 것이 없었으려나.
2025년 12월 7일,
정 다 인
당신을 보듬다, 소식지 구르다, rollingtea.net
위 그림
Reino Hietanen, MARTWA NATURA (Still life), 2009
https://www.mutualart.com/Artist/Reino-Hietanen/5439458946ADF10D/Artwork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