덜 끓인 차

소식지 구르다, 소한 편

by 구르다

차와 사람과 이야기 26 : 이야李冶










안녹산의 난 이후 육우는 장강을 따라 내려가며 오늘의 후저우(湖州)에 도착했다. 그곳은 풍경이 아름답고 인재가 많은 것으로 유명했는데, 육우에게 알맞았던 것이 인근의 샘과 차가 훌륭했다. 그곳에서 승려 교연의 소개로 이야를 알게 되었다. 그녀는 아름답기도 하거니와 시를 잘 쓰고 선(禪)에 관해 박식한 도사이기도 하여 근처의 명사들은 모두 그녀와 교류하기를 원했다고 한다.




첫 만남에서 이야는 육우에게 향긋한 차 한 잔을 권했다. 찻잔을 물끄러미 보고 있던 육우가 말했다.


“이도고의 시 재능은 오래전부터 들어왔지만, 아직도 천박함을 버리지 못했군요.”


이야가 그 말에 깜짝 놀라며 말했다.


“아직 우리는 한마디도 나누지 않았는데, 육 선생께서는 제가 천박한 언행을 버리지 않았다고 그리 확신하십니까?”


육우가 말했다.


“이 차 한 잔이면 판단을 내리기에 충분합니다.”


이에 이야가 어리둥절했다.


“당신은 세상에서 유명한 탁목령차와 예로부터 황제에게 바쳐지던 자순차가 나는 우싱에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당신이 끓여 마시는 차는 마치 일반 사람들이 그러하듯 좋은 차의 명예를 더럽히고 있습니다.”


이야가 더 놀라며 말했다.


“도와 속의 차 사이에 구분이 있는 것입니까?”


육우는


“차는 건강에 좋습니다. 갈증을 해소하고, 답답함을 없애고, 뇌통을 완화하고, 눈을 맑게 하고, 번뇌를 완화하고, 관절을 풀어주고, 졸음을 쫓아냅니다. 꾸준히 마시면 기분을 좋게 하고 사고력을 향상해 줍니다. … 하지만 이런 것들은 부차적입니다. 진정한 차 감식가는 다섯 가지 아름다움을 갖추고 있습니다. 맛의 아름다움, 찻잔의 아름다움, 불의 아름다움, 차의 맛, 그리고 주변 환경의 아름다움입니다. 차의 경지는 시적 감성이나 도교 철학과 다를 바 없습니다. 높은 경지에 이른 사람만이 천인(天人)의 조화를 이루는 맛을 낼 수 있습니다.”


이야는 크게 감명받았지만, 여전히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아직 이 차 맛도 안 보셨으면서 어떻게 제가 교양이 없다고 하시는 겁니까?"


육우가 말했다.


"차를 끓일 때, 약하게 끓이면 물고기 눈 같고, 세게 끓이면 게 눈 같습니다. 물이 물고기 눈과 게 눈처럼 깊어져야 차의 풍미가 제대로 우러나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당신은 물을 완전히 끓이지 않고 우려내서 찻잎이 물 위에 뜨고 향도 나지 않았습니다. 이는 당신이 차를 우릴 때 차분하지 못하고 집중하지 못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것이 바로 보통 사람의 모습 아닌가요?”


이에 이야가 육우를 스승으로 모시고 다도를 배웠다.




지금 기준에서 보면 이야의 삶이 그리 순탄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어린 나이에 부모의 품에서 떨어져 도사로서 길러진 운명은 자신의 선택이 아니었다. 젊어서는 분방하고 자신감 넘치게 살았지만, 묘한 구설수로 평생에 시달렸다. 황제 현종은 그녀를 불러 능력을 시험하고 상을 내려 편하게 살게 도왔지만 자유로움을 생의 목적처럼 갈망하던 여인은 다음 황제 덕종 때 반란군의 강요를 거부하지 못하고 그들을 옹호하는 시를 썼다가 결국 황제에게 맞아 죽었다.*

*박살(撲殺)형을 당했다고 기록되어 있으니, 말 그대로 때려 맞아 죽었을 것이다.


세상의 말처럼 삶이 고통의 바다라면 여성의 삶은 그 바다에 가득 떠 있는 암초와 해파리 같은 장애물들이 더해진 모양 같았을까. 유독 차시를 읽다 보면 여성의 목소리가 없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차를 통해 삶의 길을 개척하고 닦으려 했던 차인들의 이야기 속에 세상을 이루는 절반의 목소리가 빠져 있다는 것이 묘하게 슬프게 느껴지곤 한다. 단지 음료일 뿐이라면 어째서 차는 남성의 전유물이었던 것일까. 차가 그저 음료가 아니었다는 뜻이다. 공양하는 법물(法物)이고, 수양을 통해 삶을 바꾸어 보려는 이들을 위한 선물(膳物)*이지만, 이를 뒤덮고 있던 진한 먹구름이 있었다. 차는 재력과 권력을 과시하는 힘의 상징이었다. 당나라 때는 지금과 같이 차를 전문적으로 기르는 대농장도 본격적으로 형성되기 전이었으니 그 값어치는 어떠했을까.

*선물의 선(膳)은 반찬, 그리고 이를 정성스레 차려서 드시도록 권하는 것을 이르는 말이다.


역사적으로 근현대 이전 여성 차인의 존재는 한중일 모든 기록을 샅샅이 뒤져 보아도 백 명은 넘지 못하고 그마저도 일본은 전멸에 가깝다. 우리도 그나마 조선 후기에 등장하는 멋진 여성이 몇 있지만 중세로 가면 그마저도 찾아보기 어렵다. 이야라는 여성이 너무 특이했다고 보는 게 맞다. 다만 특별했으되 그로부터 변화가 시작하는 특이점은 되지 못했다는 것이 흠이다. 그녀는 일신의 자유로움을 위해 살았고 그 넓이와 깊이가 누군가를 밟아서 이룬 것이거나 상대를 괴롭혀서 일군 것이 아니니 정당하고 존중받을 만하다. 다만 해방으로서의 목적에 가 닿지 못하고 의롭지 않은 이유로 죽었으므로 후대의 귀감으로서 영향을 주지 못했음이 아쉬울 따름이다.




그로부터 천 년이 흘러 우리나라에 멋진 여성 차인이 한 명 등장했다. 그녀는 이야에 비해 일신의 자유로움은 덜했으나 틀을 벗어날 수 없다면 어떻게 후대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쳐 이어지게 할 것인가를 잘 보여준 사람이었다. 나는 차인이라는 단어가 참 무겁게 느껴질 때가 있다. 도(道)란 개인이 걷는 길이지만 역설적으로 남의 길과 어느 시점, 어느 지점에서 이어져 있음을 부정할 수도 없다. 내가 걷는 길이 누군가의 길에 영향을 준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을 때 선택은 오롯이 나의 것만이 아니게 된다. 차인은 자신의 도를 추구하는 자이면서 동시에 과거와 현재, 미래를 서로 긍정적인 방향으로 잇는 존재여야 한다. 차인이라는 이름을 함부로 붙이기 어려운 까닭은 오늘의 행적에 부끄러움이 없어야 내일 당신의 길을 혼란스럽게 하거나 방해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영수합 서씨(令壽閤 徐氏)는 그런 면에서 우리가 본받을 만한 차인이다.








2026년 1월 5일,

정 다 인










당신을 보듬다, 소식지 구르다, rollingtea.net






위 그림

Émilie Charmy, Chat et fleurs, c.1950.

https://www.emiliecharmy.fr


Émilie Charmy, Self Portrait, c.1960.

https://www.wikiart.org/en/emilie-charmy/self-portrait-19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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