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식지 구르다 2025, 청명 편
차와 사람과 이야기 11
: 추사 김정희 秋史 金正喜
나는 셰익스피어의 작품들이 존경스러우면서도 약간 두렵다. 인간을 적나라하게 투시하는 그 힘의 두께 때문이다. 고깃집에서 냉면을 세 그릇 시키고 삼겹살을 근 단위로 씹어먹는 운동선수의 그 팔뚝 두께와 더불어 두꺼운 통찰력은 때때로 우리를 두렵고도 경이롭게 한다. 나는 그의 작품 중에서 <리어왕>을 좋아한다. 셰익스피어가 만든 이야기 중에서 스케일도 크고 인물들 사이의 감정선도 복잡한 편이다. 대부분은 리어왕이 세 딸에게 잘못된 재산 분배를 하고 결국 찬밥 신세가 되어 광야로 쫓겨나 울부짖는 그 처절한 장면을 백미로 꼽겠지만 나는 그 잘못된 선택의 시발점이 된 사건의 시점 장면을 더 좋아한다. 리어왕이 세 딸에게 영지를 세 토막 내어 나눠주기 위해 각각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묻는다. 첫째는 갖은 아부와 아양으로 아버지의 마음을 흔적도 없이 녹여버리고, 둘째는 언니의 전략을 그대로 따라 해 영지를 하사받는다. 왕은 막내 코넬리아를 너무나도 사랑해서 큰 기대를 하고 질문하지만, 코넬이라는 언니들의 아부는 거짓이라 생각하며 솔직하게 대답한다.
“드릴 말이 없습니다.”
왕은 당황하고, 몇 번을 기회를 주지만 답은 여전히 같았다. 덧붙인 그녀의 말도 명문이지만 중요한 것은 막내가 아버지를 사랑하는 마음이 아무리 깊어도 결국 왕의 귀를 간지럽히지 못했고, 또한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이에 왕은 성내며 코넬리아 몫의 1/3을 장녀와 차녀에게 덧붙여 나눠주고 막내를 내쫓았다. 그녀를 옹호하는 켄트 백작에게 성을 내며 이렇게 말한다.
“켄트 백작은 아무 말 마오! 용왕의 노여움에 맞서지 마오. 나는 그 애를 가장 사랑하고 있었소. 그 애의 정다운 위로를 받으면서 여생을 보내려고 생각했었소. 나가라. 사라져 버려라. 그 애에 대한 아비로서 마음을 버린 이상, 이제 무덤만이 내게는 안식처로구나! 이 3분의 1의 영지를 둘이서 분배하오. 그 애는 스스로 ‘정직’이라고 부르는 ‘오만’과 결혼하면 된다.”
예기치 못한 비극으로 이야기는 끝나지만 결국 누가 오만했던 것인지에 대한 답은 쉽게 드러난다. 오만의 진실은 밝혀지지만 끝내 오만은 모두를 죽이고 상처입힌다.
니체는 비굴과 오만을 모두 비판해야 하지만 굳이 하나를 고르라면 오만이어야 한다고 했다. 나는 철학의 철자도 모르지만, 저 말은 문학의 영역이 사랑하는 주제여서인지 참 멋지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오만은 마치 야누스처럼 두 가지 얼굴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오만은 폭력적이다. 자기 생각이 마치 산마루의 꼭대기와 같아 하늘에 가장 근접하다 믿어 의심치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시에 오만은 가장 용맹하고 숭엄하기도 하다. 그렇게 믿어 의심치 않기 때문에 끝없이 미지 영역의 가장자리를 위협하고 틀을 깨부술 수 있는 용기를 얻기도 한다. 제인 오스틴은 자신의 작품에서 이렇게 말했다.
“허영이 정말로 결점이라면 오만은 진정으로 뛰어난 지성의 소유자라면 그것을 잘 통제할 수 있고 그것은 오만이라기보다 자긍심이라 해야 할 것입니다.”
차를 즐겨 마셨던 차인들 중에는 오만한 이가 많았다. 시대적 배경에서 차가 가진 사회적 지위 때문일 수도 있지만, 그것이 가지는 정신적 기대감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차의 인기가 식어가는 조선 후기에 홀연히 등장한 86년생 두 사람에 이르러 다시 한번 반등을 위한 움직임을 엿볼 수 있는데 그중 한 명이 추사 김정희다. (1786년생 중 다른 한 사람이 초의 의순 선사다.)
김정희는 희대의 천재였고 예술가로서의 면모뿐 아니라 다양한 분야에서 여지없이 그 능력을 뽐냈다. 탐미주의자였고, 미식가였으며, 천재적 예술가이자 불교의 교학적 면에서도 그 해석이 탁월했으며, 당연히 유학자로서도 빠지지 않는 인물이었다. 그는 일찍이 친부와 함께 다녀온 두 달간의 북경 여행을 통해 시야가 크게 트이게 되었는데 여러 방면에서 그러하지만, 특히 차를 포함한 예술과 정신적 영역에서 자부심이 대단했다.
당시 우리나라에는 향토성이 진한 서체가 유행했다. 원교 이광사의 동국진체라던가, 창암 이삼만의 유수체 같은 것들이 그러했는데, 대륙이 주도하던 시각에서 벗어나 우리만의 산수 강산과 심성을 표현하려는 경향의 결과물이었다. 이에 대해 추사는 맹렬하게 비난했다. 그가 중년에 제주도로 유배 가는 길에 해남 대흥사에 들렀는데 마친 친구 초의가 그곳의 주지로 있었다. 대흥사 현판에 이광사의 글씨가 걸려 있었는데 추사가 이렇게 말했다.
“내가 새로 써 줄 테니 저딴 것은 떼 버리시게!”
이에 난감해하며 어쩔 수 없이 초의가 글씨를 떼어 내고 추사의 것으로 바꾸어 달았다. 또한 일찍이 추사는 자신보다 열여섯이나 많은 이삼만의 앞에 대고 이렇게 무시한 적도 있었다.
“시골에서 글씨로 밥은 먹고 살 만한 글씨로구나.”
그의 이러한 오만함은 가족들과의 평소 대화에서도 엿볼 수 있었는데, 제주도에서 유배살이하는 도련님의 입맛이 얼마나 까다로웠는지 재혼한 아내에게 반찬을 제대로 만들어 보내라며 독촉하는 편지를 쓴 일이 특히 유별났다. 하지만 되돌아온 것은 아들이 보낸 어머니의 근황이었고, 아내는 병을 앓아 시름시름 죽어가고 있었다. 아차 싶어 추사가 급히 사과와 위로의 글을 적어 보냈지만, 그 편지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아내가 고인이 된 후였고 편지는 결국 수취인불명이 되고 말았다.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세한도>가 만들어지고, 추사체가 정립되고, 오늘날 우리가 기억하고 추앙하는 추사 김정희의 예술적 완성은 이 순간으로부터 비롯하였다. 그가 지인들을 대하는 소탈하면서도 방자한 태도는 죽을 때까지 변함이 없었지만, 그의 예술세계는 오만에 자기 비판적 경향이 깃들기 시작하며 무르익었다. 추사는 제주도 유배살이를 8년 만에 마무리하며 해남 대흥사에 다시 들렀다. 그는 친구 초의에게 지난 일을 사과하며 자신의 글씨를 떼고 이광사의 현판을 다시 걸어 달라 부탁했다. 지금 대흥사에 가면 두 글씨가 나란히 걸려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는 서울로 올라가는 길에 이삼만의 고향 전주집을 들렀으나 이미 이삼만은 고령으로 죽고 없을 때였다. 이에 추사는 미안하고 부끄러운 마음을 마음 깊숙한 곳에 심어 묻으며 자신의 비옥한 땅 곳곳으로 퍼져나가도록 했을 것이다. 몇몇 가벼운 이들은 추사가 글씨에서 넘치는 힘과 시대를 앞서는 세련됨을 찾겠지만 차와 선을 함께 이야기하던 말년의 추사를 생각하며 나는 역시 멋진 예술가에게서 오만을 빼놓을 수는 없겠구나 싶다.
2025년 4월 4일,
정 다 인
당신을 보듬다, 소식지 구르다, rollingtea.net
"‘煎’은 마치 화로에서 차를 달이는 모습이다. 화로에 흩날리는 불꽃과 튀는 찻물을 연상시키는 ‘煎’, 이에 ‘茶’가 호응한다. 살아 움직이는 ‘煎茶’와 방정하고 평온한 ‘三昧’, 한 작품 속 다른 느낌의 필법이다. ………추사가 구사한 창의적 필법 때문이다. 붓 가는 대로 자유자재한 추사체, 그야말로 명불허전이다.", 국가유산청_김정희 편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