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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롤로 Jun 07. 2024

쉬면서 합시다.

대학교 4학년 학년 말의 일이다. 오랫동안 준비했던 중요한 시험도 끝이 났고, 전공 공부도 끝이 난 상황이라 딱히 할 것이 없었다. 여유로운 술자리에서 각자 이제 무엇을 해야 할까 하고 고민하던 순간에 친구 중 누군가는 영어 공부를 하겠노라 했고, 누군가는 운전면허 시험을 준비할 거라 했고 또 누군가는 운동을 해서 체력을 기르고 싶다고 했다. 나는 친구들의 이야기를 듣는 둥 마는 둥 맑은 소주를 따라 마시며 생각했다.


"아니, 꼭 뭘 해야 하나?"


솔직히 힘들었다고 말하고 싶다. 6년간 전공 공부와 과제와 시험을 준비하는 과정과 또 그 안에서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했던 수많은 아르바이트들, 주말이라고 내내 쉬어 보지도 못하고 학업과 알바를 병행하는 삶에 지쳤던 터라 사실 그때의 나는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아르바이트야 계속 해야 했지만 당분간은 연필과 볼펜을 잡고 싶지도, 노트를 펼쳐보고 싶지도 않았다. 그런데 영어 공부와 운전면허와 운동이라니 정말 대단한 아이들이라고 생각했다. 그때 동욱이가 말했다.


"우리 다 같이 하자"


졸업까지 적어도 넉 달은 남아 있으니 계획만 잘 짜면 영어와 운전면허와 운동 세 마리 토끼를 모두 다 잡을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둥그런 테이블을 둘러싸고 엉겹결에 다같 계획을 짜기 시작했다. 월수금에는 영어 공부를 하고 화요일 목요일에는 함께 면허 학원을 간다. 그리고 틈틈이 만나 유산소와 웨이트 등 체력을 기르기 위한 운동을 하기로 했다. 엉성한 안주와 과하게 들이마신 소주만 아니었다면 실로 완벽한 계획이었다. 


계획은 다음날 아침부터 차질을 빚기 시작했다. 오전에 만나 빈 강의실에서 토익 수강 신청을 하고 수업을 듣기로 했지만 그 누구도 강의실에 가지 못했다. 술병이 난 탓에 다들 기숙사 침대에 누워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저녁 운동에는 2명이 나왔는데 잠깐 스트레칭을 하다가 춥다며 기숙사로 기어들어갔다. 다음날 면허 시험을 위해 학원에 전화했더니 우리 넷을 싣기 위한 봉고차를 보내주었다. 면허 계획만 수월하게 진행되었다.


놀랍게도 계획이 무색하게 토익 수업은 없는 일처럼 넷의 머릿속에서 조용히 자동산화되었다. 다들 없었던 일인 것처럼 무시했고, 심지어 책도 사지 않았다. 면허 시험도 차로 데리러 오니 겨우겨우 맞춰서 가는 수준이니 알만했다. 6년 공부에 다들 지쳐있었을 테지만 어떤 관성 같은 것 때문에 '또 공부를 해야 하나 면허시험을 준비해야 하나 몸을 움직여야 하나'하고 고민했던 듯하다. 결국 다른 셋도 나와 같은 마음이었던 것이다.


그때 깨달았다. 가끔은 쉬어야 하는 때가 있다는 것을. 가끔은 영어 공부보다, 일보다, 체력을 기르는 것보다 중요한 쉼이 필요한 순간이 있다는 것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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