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2024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롤로 May 27. 2024

소공녀(Microhabitat)

소공녀적인 삶에 대한 동경

제주도로 떠난 선재의 이야기를 들었다. 전셋집을 정리하고 세간살이를 부지런히 당근으로 팔아 몸을 가볍게 하여 작은 suv 한대에 짐을 실어 배를 타고 제주로 갔다고 했다. 젠셋집을 정리한 돈으로 겨우 얻은 작은 구옥을 고쳐서 방 한편은 마치 조선시대 사랑방처럼 만들어, 민박 또는 오늘날 민박을 부르는 새로운 말인 에어비엔비에 올려 두고 산다고 했다. 가보니 집은 정갈하게 잘 정리되어 있었고, 사랑방도 제법 붐벼 한가롭기도 하며 바빠 보이기도 한다고 했다. 전하는 말이니 진짜일지는 모르겠지만 서울에서와는 달리 항상 웃는 모습을 하고 있어서 그게 보기 좋았다고도 했다.


솔은 선재가 제주도에서 항상 웃고 있었다고 했다.


위스키가 담겨 있는 맑은 잔을 손으로 빙빙 돌리며 솔은 말했다. 선재의 삶이 부럽다고, 그 말을 들은 나 또한 선재의 삶을 동경한다고 했다. 누군들 그렇지 않을까. 원하는 것을 하며 사는 삶을 동경하지 않을 이는 없다. 나이를 먹을 만큼 먹은 우리는 안다. 원하는 것을 하며 사는 삶이 얼마나 어려운 삶인지를, 그러면서 우리는 어릴 적 함께 봤던 영화 '소공녀'를 떠올렸다. '소공녀'를 보고 우리 셋은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솔과 나는 그때 주인공인 '미소'의 삶을 '동경'한다는 것과 우리가 하지 못한 선택을 한 그녀의 삶을 '질시'했다는 것도 인정했다. 그때 선재는 이런 말을 했다. 나도 언젠가 원하는 것을 찾아 떠나고 싶다고

'소공녀'의 주인공인 '미소'는 원하는 것을 찾아 떠나지는 않았다. 그녀는 원하는 것을 지켜내려고 노력했다. 생계가 어려워지면, 혹은 삶을 유지하는 것이 어려워지면 우리는 아마 가장 먼저 버릴 것들을 그녀는 가장 오래 지켰다. 담배와 위스키와 남자친구를 지키기 위해 그녀는 고군분투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지키기 위해 집을 버리고 친구들의 집을 전전하면서 그녀는 깨달았을지도 모른다. 원하는 것을 지키며 사는 삶이 결코 초라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지키는 것 없이 버리고 현실에 타협하며 사는 사람들의 삶 또한 결코 안락하거나 평온하지 않다는 것을 말이다.


나와 선재와 솔은 이미 어렴풋이 알고 있던 것을 그날 '미소'의 눈으로 확인해 버리고야 말았다. 남들이 부러워하는 결혼을 한 사람도, 남들 다 하니까 하며 사는 사람도, 부모의 밑에서 유복하게 사는 사람도 자신이 원하는 무언가를 잃게 되면 어떤 삶을 살게 되는지 영화를 통해 보게 된 것이다.


더 이상 찾아갈 친구의 집도, 가진 돈도 다 떨어져 갈 때 글렌피딕의 가격이 올랐음을 알게 된 미소의 표정을 기억한다. 결국 마지막 남은 취향까지도 잃게 될까 두려워하던 그녀의 복잡 미묘했던 표정. 그 표정은 영화를 보고 한참이 지난 후에도 가끔씩 머릿속에서 되살아나곤 한다.


"집은 없어도 생각과 취향은 있어."


솔과 나는 '미소'가 자주 가던 위스키바 '코블러'에 앉아 영화의 명대사를 읊었다. 우린 집도 없고 생각도 없고 취향도 없이 살고 있는 것 같다며 서로 자조 섞인 이야기를 하며 위스키를 마셨다. 언젠가 우리도 어떤 취향 혹은 무언가 지키고 싶은 것을 지키기 위해 실행을 해야 할 때가 온다면 주저 없이 하기로 약속했다. 그리고 조만간 시간을 내어 제주도에 가 선재를 만나자 이야기하며 그날의 자리를 마무리했다.

매거진의 이전글 독감이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