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시

by 롤로

순례 할머니가 보이지 않았다. 승범은 매달 첫째 주 수요일 오전, 병원 진료실 문을 닫고 가리봉동에 위치한 요양원에 의료 봉사를 다닌다. 봉사라고는 하지만 친구가 대표 원장으로 있는 정형외과에 속해 있는 승범으로서는 자의 반 타의 반인 셈이었다. 하지만 몇 년 정도 다니다 보니 어느새 할머니들과도 꽤 정이 들어 이제 승범에게 가장 중요한 스케줄 중 하나가 되고야 말았다. 승범은 할머니들의 부고 소식이나 퇴원 소식을 꼭 유선으로 전달해 달라는 부탁까지 해둔 참이었다. 순례 할머니의 부고 소식이 따로 들려온 건 없었으니 '돌아가시진 않았겠지'하고 생각하던 차에 접수대 뒤 탕비실에서 순례 할머니가 작은 손행주를 들고 나타났다.


"승범이 왔냐."

"예, 저 왔어요. 오늘 진료 있으시잖아요. 그거 두고 얼른 진료실로 오세요."


며칠 사이 급작스럽게 떠나는 분들이 워낙 많아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요양원 내에 임시로 만든 진료실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순례 할머니가 손행주를 두고 느릿느릿 힘겹게 걸어오시는 걸 지켜보던 승범은 아무래도 조만간 병원에서 한번 봬야겠다고 생각했다. 진료실 의자에 앉은 순례 할머니의 두꺼운 솜바지를 힘겹게 말아 무릎 위까지 접어 올렸다. 다리에 살이 없어 두툼한 솜바지를 입었음에도 헐렁한 공간이 많이 남았다. 바지를 다 올리고 나자 덕지덕지 붙어 있는 파스 때문에 승범의 눈까지 따가웠다.


"힘 빼세요."


힘을 뺀 할머니의 다리를 들어 무릎을 굽혔다 폈다 할 때마다 할머니는 눈살을 찌푸렸다. 무언가 달그락달그락 걸리는 느낌이 승범의 손에도 전해지는 것만 같았다.


"안 되겠어요. 다음 주에 내원하셔서 사진 한번 찍어보셔야겠어요."

"뭐 한다고. 죽을 날 받아둔 사람이 병원 가서 또 돈지랄을 하나. 일없다. 파스나 몇 장 주고 가"


말아 올렸던 솜바지를 곱게 펴 내리고 두툼한 양말을 신겨드린 뒤 승범이 말했다.


"날은 무슨 날을 받아요. 여기서 제일 건강하신 분이. 예약 날짜 잡아서 원장님한테 이야기해 놓을게요. 같이 오세요. 바람도 쐴 겸"

"바람은 무신, 이 나이에 바람 잘못 쐬면 바로 무덤 가는 거야. 부엌에 고구마 삶아놨으니까 와서 같이 먹고 가라."

"오. 금방 갈게요. 광주 할머니랑 옥순 할머니만 보면 돼요."

"오냐"


승범은 진료를 마치고 할머니들과 접견실에 같이 앉아 고구마를 까먹었다. 누구 손자가 어디 대학에 붙었네, 누구 손녀가 결혼해서 아들 딸을 낳았네, 누구 아들내미가 이번에 30평대 아파트로 이사를 했네. 그런 류의 이야기들이 오고 갔다. 늘 느끼는 거지만 할머니들의 이야기에 어둡고 슬픈 소식은 없었다. 슬픔의 지척에서 항상 자식들의 행복과 안녕을 걱정하고 또 그런 것들을 자랑하는 할머니들이 어떨 때는 측은해 보이기도 했지만, 승범은 그 안에 있으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 행복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하나 더 먹어봐"

손으로 김치를 지익 찢어 고구마 위에 올려주시며 순례 할머니가 말했다.


"이제 진짜 그만요. 더 먹으면 저 병원에서 오후 진료 못 봐요. 지금도 배 터질 거 같아요."라고 말하는 순간 김치로 감싼 고구마가 입속으로 쑤욱 들어왔고, 승범은 우걱우걱 씹으며 왠지 자신도 할머니의 자랑이 된 것 같아 깊은 행복감이 온몸으로 느껴졌다. 식혜와 함께 고구마를 겨우 목 뒤로 넘기고, 옷가지와 왕진 가방을 정리하며 진료실을 바삐 나설 때 한참 떨어진 곳에서 순례 할머니가 말했다.


"오늘 저녁, 안 잊어버렸지?"

"네?, 네에!"


승범은 시계를 보며 지금 출발해야 겨우 오후 진료 시간에 맞춰 도착할 수 있겠다 생각했다. 그리고 무슨 약속인지 짐작도 못하면서, 알고 있다는 듯 방긋 웃으며 할머니의 물음에 건성으로 대답했다. 예전에 광주 할머니가 자기 손주의 생일 파티에 자신을 부르려고 했던 일을 떠올리며, 이번에도 별거 아니겠지 하고 생각했다. 그래도 일말의 찜찜함은 남아 있어 나중에 '순례 할머니한테 전화해서 물어봐야지'하고 생각했다. 병원에 도착하자 밀려 있던 예약 환자들이 도미노 넘어지듯 몰려들어왔다. 숨 가쁘게 환자들을 밀어내고 이제 한숨 좀 돌리려는데 승범의 핸드폰으로 전화가 왔다.


"네 한빛 정형외과 이승범입니다."

"아 원장님 안녕하세요. 여기 가리봉 요양원 이정미 팀장이에요."

"네, 안녕하세요. 팀장님 무슨 일이세요?"

"바쁘실 텐데 죄송해요. 순례 할머니께서 꼭 통화해야 된다고 하셔서요. 바꿔드릴게요."


전화기 너머로 "승범이여?" 하는 소리가 들렸고 곧 할머니께서 전화를 이어받으셨다.


"할머니, 무슨 일이세요? 무릎이 많이 안 좋으세요?"

"아무려도 승범이 니가 새까맣게 잊어버린 거 같어서 전화했다. 영암댁 죽었을 때 장례식장에서 받은 쪽지 기억 하냐. 영암댁 며늘아가 참한 아가씨 있다고, 그날 약속 날짜랑 카페인지 뭐시긴지 이름이랑 전화번호 적어가지고 넘겨 준 것 말이다. 내가 암만 생각해도 니가 흐리멍텅허니 실없이 웃으면서 대답하고 가는 것이, 홀랑 까먹은 거 같아서 전화 혔다. 영암댁 살아 있을 때 니를 앵간치 아끼지 않았겄냐. 니 혼자 늙어 죽을까밤시 영암댁이 며느리 달달 볶아 받아낸 거니께 죽은 영암댁 봐서 나 죽었다맹키 생각하고 함 다녀 오니라."


순간 승범의 등줄기에서 식은땀이 주룩 흘러내렸다. 전화를 끊고 부리나케 쪽지를 찾았다. 서랍과 스케쥴러, 지갑 안, 쪽지를 둘만한 곳을 샅샅이 살펴보았지만 어디에도 쪽지는 없었다. 혹시나 해서 불시에 찾아오는 장례식에 대비하기 위해 늘 병원에 모셔두고 있는 검은색 정장을 살펴보았을 때, 바지 뒷 주머니에서 비로소 네모 반듯하게 접힌 쪽지를 발견할 수 있었다. 쪽지를 펴서 내용을 확인하려는 순간 정간호사가 들어와 조용히 속삭였다.


"원장님, 뭐 하고 계셨어요? 마지막 환자 분이에요. 콜 없으셔서 제가 직접 왔습니다."

쪽지를 도로 접어 바지 주머니에 집어넣으며 승범이 말했다.

"네네, 들여보내주세요."


시간을 확인하니 5시 30분 정도가 되어 있었다. 환자가 들어오기 전 정장을 정리해 캐비닛에 넣고 문을 닫은 뒤 어지럽게 널브러져 있는 책상과 서랍을 정리했다. 그래도 쪽지를 찾아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던 차에 마지막 환자가 진료실 문을 조용히 열고 들어왔다. 환자는 가방과 겉옷을 진료실 문 옆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뒤 동그란 진료실 의자에 앉았다. 그 순간 정신을 차린 승범이 환자와 눈을 마주하고 점잖게 물었다.


"어디가 아파서 오셨나요?"

"손이요. 오른손 검지 손가락에 가시가 박혀 있는 것 같아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