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련

by 롤로

개찰구 앞 안내 화면에 신도림행 지하철이 곧 도착한다는 메시지가 보인다. "뛸까? 걸음을 조금 빠르게 걸어볼까? 아니다. 아무래도 타기 힘들 것 같다. 그냥 포기하자." 여러 생각을 고민하던 재영은 무심한 듯 걷기로 했고, 결국 간발의 차이로 지하철을 놓치고야 말았다. 뛸 생각도 없었고 3분만 있으면 곧 다른 지하철이 올 텐데도, 코앞에서 매정하게 닫히는 지하철 문을 바라보던 재영은 못내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곧 도착한 다음 열차에 올라탄 재영은 출근 시간대가 지난 늦은 아침이라 한가한 지하철 자리들을 살펴보다 맨 끝자리 의자에 가 앉았다. 핸드폰을 뒤적거리던 재영은 이내 흥미를 잃고 가방에 집어넣었다. 그러자 곧 범기 생각이 스멀스멀 기어올라왔다. 어느 노래 가사처럼 둘의 이별은 "요란할 것도 없었다." 범기는 짧게 헤어지자고 말했고, 재영도 짧게 알았다고 말했다. 7년의 세월은 그렇게 요란할 것 없이 짧고 건조하게 끝을 맺었다. 범기와 헤어지고 나서 집에 와 재영이 엄마에게 말했을 때, 엄마는 위로 대신 되려 크게 화를 냈다.


"미쳤어? 울고불고 매달려도 시원찮을 판에 그러고 그냥 집에 와? 네가 범기 같은 애를 또 만날 수 있을 것 같아? 빨리 다시 연락해. 범기보고 잘못했다고 빌어!"


재영은 생각했다. 잘못을 빈다? 엄마의 말에 자신이 어떤 잘못을 했는지 최근의 일부터 곰곰이 생각해 봤다. 글 쓴다는 구실로 일도 하지 않고 여전히 엄마의 그늘 밑에 빌붙어 사는 자신의 삶을 잘못했다고 빌어야 할까? 아니면 제2의 '홍자매'를 꿈꾸며 함께 글을 쓰기로 했다가, 자신을 '배신'하고 기자가 되어 글 써서 밥 벌어먹고사는 언니에 대한 분노에 대해 빌어야 할까?(이 자격지심의 발로로 인한 재영의 신경질적 발작 때문에 옆에 있던 범기는 실제로 상당히 괴로워했다.) 수도 없이 많은 잘못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지만 재영이 생각하기에 그 어느 것도 범기와 자신의 사이에 직접적인 이별의 사유가 될 것 같지는 않았다.


그때부터였을까. 이별 후 꽤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재영이 여전히 범기를, 이별의 이유를 쫓게 된 것이. 아직 부모님께 경제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의지하며 삶을 사는 재영에게 있어 범기는 완전한 자신의 세계이자 구원이었다. 좀 나중에 든 생각이지만 범기는 엄마에게 있어서도 동아줄 같은 존재였을지도 모른다. 엄마의 그늘 아래서 아이처럼 똬리를 틀고 있는 재영을 일으켜 세워 자신의 세계로 인도하고, 딸에게서 엄마를 해방시켜 줄 구원자 같은 것 말이다. 하지만 딸의 관성은 범기라는 별의 중력까지 가 닿지 않았고, 다시 엄마라는 태양 아래로 회귀해 더 구석진 곳에 자리 잡고 빙빙 돌고 있었다.


이별 후 약 석 달 정도 지났을까. 재영은 그래도 뭔가 생산해 내야겠다는 의지로 컴퓨터 앞에 앉았지만, 눈가에 맺힌 눈물 때문인지 글자들이 빗물처럼 흘러내려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즈음 재영은 늘 궁금했다. 범기가 왜 자신을 놓아버렸는지, 그리고 자신은 어째서 이별을 말하는 범기에게 그 이유를 묻지 못했는지 말이다. 당분간은 글도 쓸 수 없을 것 같아 안 되겠다 싶어 카페 아르바이트 일을 구해 시작했는데, 벌써 6개월 정도의 시간이 지났다.


문래역에 내려 10분 정도 걸어 카페에 도착한 뒤, 바닥을 쓸고 로스팅된 커피들을 작은 병에 조금씩 옮겨 담았다. 아이스크림과 주류 납품을 받고 오픈 준비를 마무리 하자 시간은 벌써 11시가 다 되어 있었다. 일을 하는 동안은 범기에 대한 생각으로부터 잠시 자유로울 수 있었다. 특히 사람들이 몰리는 시간이 되면 재영은 모든 것을 잊을 수 있었다. 이렇게 일을 하며 시간을 채워나가면 어느 순간 범기에 대한 기억들, 후회나 미련 같은 것들이 자연스럽게 잊혀지지 않을까 하고 재영은 생각했다. 오후 4시쯤 여유가 조금 생겨 이른 저녁을 먹기 위해 아르바이트생들과 카페 앞 작은 식당에 들렀다. 반찬으로 나온 미역 줄기를 건조하게 씹고 있을 때 엄마한테 문자 한 통이 날아왔다.


"오늘 저녁 7시에 네 언니 거기서 소개팅한다. 상황 잘 지켜보고 저녁에 나한테 와서 이야기 좀 해줘라"


재영은 반찬을 마저 씹고, 핸드폰의 전원 버튼을 꾹 눌러 꺼버린 뒤 주머니에 넣어버렸다. 다시 카페로 돌아와 홀을 정리하고 접시와 컵을 한데 모아 식기 세척기에 밀어 넣었다. 저녁 손님들이 곧 밀어닥칠 시간이었고 이미 카페는 거의 만석이었다. 7시쯤이었나, 카페 문이 열리고 익숙한 모습의 '배신자'가 나타났다. 자신에게 가볍게 눈인사를 하고 빈자리에 가 앉아 핸드폰을 만지작 거리고 있는 것을 보았는데, 곧이어 어리바리하게 생긴 남자가 카페로 들어오자 '배신자'는 깜짝 놀란 눈으로 그를 맞이했다. 왜인지 그 남자도 꽤나 놀란 눈치였다.


둘은 앉은자리에서 휘낭시에 두 개와 치즈케이크 하나, 아메리카노와 카페라떼를 한 잔씩 해치우더니 꽤 오랜 시간 이야기를 하다가 떠났다. 재영은 둘이 떠난 자리를 정리하며, "웃고 떠드는 모습을 보니 제법 잘 맞는가 보다."하고 생각했다. 그 후에도 카페는 한동안 북적거렸다. 북적거림으로 가려둔 재영의 마음속 복잡함이 마감 시간과 함께 다시 찾아왔다. 카페의 의자를 모두 테이블 위에 올린 뒤 로봇 청소기를 작동시키고 카페 문을 닫았다.


카페 마감을 한 뒤 문래역으로 부지런히 걸어가면 막차를 탈 수 있다. 곧 자정을 넘길 시간인 지하철 역사는 막차를 타려는 사람들로 항상 북적거렸다. 보통은 거나하게 취한 사람들이 많아 늘 시끌시끌했다. 하지만 오늘따라 역사 안이 이상하리만치 조용했다. 재영은 "설마..." 하는 생각이 들어 개찰구를 지나 뛰어 내려갔다. 사람들을 가득 태운 막차가 문을 닫고 유유히 플랫폼을 떠나고 있었다. 예상도 대책도 없이 맞이한 막차의 부재가 재영을 우울하게 만들었다. 그 순간 바쁜 일상으로 팽팽하게 당겨놓은 선 하나가 "탱"하는 소리를 내며 끊어져버린 것만 같았다. 열차가 떠나고 아무도 없는 플랫폼에 앉아 재영은 한참 동안 서럽게 울음을 토해냈다. 그리고 핸드폰 전원을 켜고 열 통도 넘게 온 엄마의 문자 메시지를 뒤로한 채, 많은 시간이 지났지만 아직도 머릿속에 선명하게 남아 있는 범기의 전화번호 숫자를 하나하나 꾹꾹 눌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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