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문과 XX학번 졸업생들의 단톡방에는 전설처럼 전해지는 이야기가 몇 가지 있는 데, 그중 하나는 박봄(본명 : 김난영)의 운전면허 시험 이야기이다. 이야기를 하기 전 김난영이 박봄이라 불리게 된 계기를 먼저 이야기해야 하는데, 이는 신입생 O.T에서 김난영 본인이 본인의 입으로 본인이 박봄과 닮았다고 한 것에서부터 시작이 되었다.
아무리 살펴보고 요리조리 뜯어보아도 박봄이랑 닮은 점은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던 선배들은 도대체 어디가 닮은 것이냐고 되물었는데, 이에 김난영은 오동통한 자신의 입술을 쭈욱 내밀며 "입술이요"하고 말했다. 그 말에 실망한 선배들이 안주를 바닥에 집어 던졌고, 비쭉 내민 박봄의 입술을 보고 아주 크게 실망한 한 선배는, 마시던 술잔을 조용히 내려놓은 뒤 방 문을 닫고 나갔다는 이야기도 늘 함께 따라다녔다. 여하튼 그 후로 선배들 그리고 동기들도 김난영을 박봄이라고 부르기 시작했고, 김난영은 그렇게 영문과의 박봄이 되었다.
영문과 박봄은 졸업과 동시에 운전면허를 따기 위해 운전면허 학원에 등록을 했다. 박봄은 혼자 등록하기에는 조금 두려웠던지 자신의 집과 직장이 가까웠던 나에게 함께 등록할 것을 권유했고, 나 또한 면허가 필요하였기에 함께 학원에 등록을 했다.
저렴한 곳을 찾다 보니 면허학원은 사는 곳과는 조금 먼 부평까지 가야 했는데, 시간에 맞추어 셔틀이 데리러 오기에 크게 불편한 것은 없었다. ㅇㅇ에서 박봄을 먼저 태운 셔틀은 ㅁㅁ에서 나를 태우고 또 몇몇 사람을 더 태운 뒤 부평으로 내달렸다. 박봄은 다른 사람들에게 우리 사이를 오해받는 것이 싫었던지 셔틀에서는 나와 어색한 사이인 척했는데, 아무도 신경 안 쓰는데 자기 혼자 그러는 꼴이 괜히 열이 받았다. 이러한 행태는 특히 젊은 남자들이 셔틀에 탔을 때 더욱 심해졌다.
학원에 도착한 우리는 기초 교육과 함께 얇은 문제집 한 권을 나눠 받았는데, 그것은 운전면허 필기시험 기출문제집이었다. 강사는 필기시험은 학원에서 볼 수는 없고, 강서운전면허 시험장에 가서 봐야 한다고 말하며 언제 볼 것인지를 물었다. 우리는 날짜를 계산해 보다가 마침 다가오는 토요일에 시험이 가능하기에 그때로 하겠다고 했다. 강사는 합격증 받아서 다음 주에 학원 올 때 가지고 오면 된다는 이야기를 해주었다. 학원에서의 일정을 모두 마치고 박봄은 기출문제집을 소중하게 안고 셔틀에 올라탔다. 그때 박봄의 눈에 무언가 광기 같은 것이 스쳐 지나갔지만, 나는 학원에 올 때 셔틀에서 있었던 일로 마음이 상해 있었기 때문에 애써 무시했다.
며칠 후 친구들과의 술자리에서 자연스럽게 면허 이야기가 나왔고 면허를 이미 딴 친구들은 하나같이 "필기 대충 준비해도 돼, 그거 그냥 상식이야 상식, 대충 맞는 말만 찍으면 된다니까."라고 말했다. 가장 최근에 면허를 획득한 지용이는 "시험 전날에 기출문제 한 시간만 보면 돼 그 이상은 공부하지 마 시간 낭비야!"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하긴, 60점만 맞으면 합격인 시험을 4년제 대학교를 성실한 성적으로 졸업한 내가 떨어질 리가 없었다. 친구들의 응원 아닌 응원에 나는 괜히 용기가 생겨 금요일 밤, 기출문제를 대충 한번 훑어보고 다음날 아침 시험장으로 향했다.
시험장에 도착하니, 먼저 온 박봄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박봄은 접수까지 모두 끝낸 상태에서 나에게 접수 방법을 하나하나 알려주고 시험장에 대한 안내까지 해줬다. 무서운 여자였다. 심지어 복장도 대학교 때 전공시험 볼 때처럼 회색 츄리닝 바지에 머리를 위로 묶고, 눈알이 뱅글뱅글 도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도수가 높은 뿔테 안경까지 쓰고 있었다. 가장 무서웠던 것은 학원에서 나눠준 기출문제집이 너덜너덜해져 있었다는 것인데, 저 문제집 가지고 대체 뭘 했길래 저렇게 너덜너덜하게 된 건지 심히 의심스러웠다.
"야, 너 뭐 이렇게 빨리 왔냐. 아침은 먹었어?"
"아침은 무슨 아침. 시험 끝나고 순대국밥이나 하나 때리고 가자."
박봄은 아이돌답지 않게 순대국밥도 좋아했다.
"그래, 그러자. 시험 오랜만이라 긴장된다."
곧 시험이 시작되었고, 나는 박봄 뒷 줄에 앉아 시험을 보았다. 문제는 생각보다 어려웠다. 기출문제에서 보았던 문제는 바로 풀 수 있었지만, 처음 보는 문제는 생각할 시간이 제법 필요했다. 꾸역꾸역 문제를 풀고 마지막 '제출' 버튼을 누르자 모니터 화면에 바로 점수가 떴다. 65점. 겨우 커트라인을 넘긴 점수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시험실 문을 나섰다. 한참 뒤에 박봄이 시험 시간을 꽉 채우고 나왔는데, 표정이 제법 비장했다.
"야 박봄. 너 몇 점 맞았어"
고개를 돌린 박봄은 질문이 하찮다는 듯한 눈길로 나를 보며 말했다.
"너는?"
질문을 질문으로 되돌려 치는 박봄의 거만함이 얄미웠지만, 나는 순순히 점수를 불렀다.
"65점"
"공부 좀 하지 그랬니, 나 100점이야"
"...."
며칠 전 지용이가 술자리에서 했던 말이 문득 떠올랐다. "그거 100점 맞는 게 이상한 거야. 100점 맞으면 평생 놀림감 된다." 역시 박봄은 대단한 여자였다. 기분 탓일까 오늘따라 박봄을 닮은 김난영의 입술이 유독 오동통하니 우쭐대는 것처럼 느껴졌다. 순대국밥집 문을 열고 개선장군처럼 들어서던 박봄은 순대국밥의 구수한 향기에 기분이 좋아졌는지 자신이 밥을 산다고 했다.
우리는 우여곡절 끝에 기능 시험을 합격하고 마지막 관문인 도로주행만 남겨두고 있었다. 도로주행 시험이 다가올수록 박봄은 눈에 띄게 긴장했다. 아니 안 해도 될 긴장을 과도하게 했고 그 때문인지 연수 때 실수를 남발했다. 학원 안전봉을 들이받는다거나, 중앙선을 밝고 달린다거나, 깜빡이도 켜지 않고 끼어드는 등 자잘한 실수를 계속해서 반복해 도로주행 강사님들을 힘들게 했다. 필기 만점자의 자신감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가끔 그 모습이 측은해 보이기도 했다.
도로주행 시험 당일, 나는 박봄에게 청심환을 챙겨주며 말했다.
"야, 긴장하지 마. 게임한다고 생각해 게임. 자동차 게임 같은 거 있잖아."
"나는 그런 게임해본 적 없는데."
박봄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청심환의 포장지를 벗기고, 계란 노른자만 한 크기의 알약을 씹지도 않은 채 삼켰다.
시험은 박봄이 먼저 운전석에 앉아 도로주행 시험을 보고 뒷좌석에 있던 내가 도착지점에서부터 운전해 학원으로 다시 돌아오는 방식으로 진행될 예정이었다. 같은 차를 타고 시험을 봐야 하는 나로서는 박봄의 저런 긴장한 모습이 신경 쓰일 수밖에 없었다. 그때 강사님이 시험용 차를 끌고 와 우리 앞에 세우고는 운전석에서 내리며 말했다.
"자 이제 시험 시작할 겁니다. 김난영 씨 먼저 운전석에 앉아주세요."
그 순간 박봄의 눈이 초점을 잃었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운전석 문을 연 박봄은 자리에 앉자마자 배운 대로 시트를 조정하고 양쪽 사이드미러를 확인하고, 백미러를 자신의 눈높이에 맞췄다. 그리고 사이드 브레이크를 풀고 풋 브레이크를 밟으며 '드르릉'하고 시동을 걸었다. 경쾌하게 자동차의 시동이 걸리는 그 순간 강사분이 시험 채점표를 '탁'하고 대시보드에 올려놓더니 말했다.
"김난영 씨, 안전벨트 안 매시고 시동 거시면 어떡합니다. 시동 끄고 차에서 내리세요. 실격입니다. 뒷자리로 가시고 장범기 씨 운전석으로 오세요."
그 순간 나는 박봄의 오동통한 입술이 닭똥집처럼 쪼그라드는 것을 보았다. 그 후 기세 좋게 내리 다섯 번을 연달아 떨어진 박봄은, 여섯 번째 시험만에 합격증을 받아 들 수 있었다. 이후 박봄의 운전면허 스토리는 영문과 XX학번들 사이에서 전설처럼 떠돌았고, 나는 그 전설의 성실한 전승자가 되어 여기저기 이야기를 퍼뜨리고 다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