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밤에 든 생각

by 롤로

한여름의 햇살과 열기가 여전히 그 존재감을 과시하며 물러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 8월의 어느 날, 어김없이 찾아온 처서 덕분에 아침저녁으로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했다. 여름이 떠나가는 것이 아쉽다가도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는 것을 살갗으로 느끼고 나면, 마음 한 편에서는 그 열기와 흥분의 나날들을 비워내고 앞으로 찾아올 차분하고 차가운 계절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야 만다.


"8월 25일 2시 난지 캠핑장 예약 오픈이야. 이번엔 진짜 정신 똑바로 차리자 다들"


무더위 속에서도 절기를 유심히 지켜보고 있는 캠퍼들이라면 이즈음부터 본격적으로 가을 캠핑을 즐기기 위한 계획을 실행한다. 캠핑을 혹은 바깥을 아무리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한여름의 열기를 정면으로 마주하는 것은 큰 부담이고 고욕이다. 때문에 여름내 웅크리고 있던 캠퍼들은 캠핑을 위한 최상의 날씨인 가을의 날들을 놓치지 않기 위한 준비를 하는 것이다. 그 준비는 우선 힘겨운 예약 전쟁에서부터 시작이다.


"야, 정숙아 너나 잘해. 한 번도 성공한 적 없는 게 왜 나대."

"맞지. 어차피 나랑 옥순이 성공할 거니까 너는 그냥 조용히 있으면 돼"


성공적인 예약을 위해 우리를 단속하려던 정숙이는 나와 옥순의 지적질에 발끈하고야 만다. 단 한 번도 성공한 적 없는 똥손 나부랭이가 나대는 것을 나와 옥순은 참지 못했다. 10여 명의 인원으로 시작한 캠핑 모임은 이제 나, 정숙, 옥순 이렇게 3명뿐이다. 누군가는 출산을 위해 더 이상 캠핑을 할 수 없게 되었고 또 누군가는 바쁜 일상 때문에 그리고 또 누군가는 모임에서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마음을 주며 찔러보다가, 불쾌해져버린 관계 속에서 조용히 사라지기도 했다. 용인에 사는 그 형님은 정숙에게도 마음을 주었는데, 한동안 정숙은 그러한 일이 있었다는 사실조차 수치스러워했다. 우린 아직도 그 일로 정숙이를 밤새 놀릴 수 있다.


결국 예약은 옥순이 성공했다.


예약 당일 난지 캠핑장에는 정말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접근성도 좋고 시설도 좋으니 사람이 많을 수밖에 없다. 퇴근 후 캠핑장 앞에 모인 우리는 내가 퇴근하며 마포농수산시장에서 사 온 초밥과 떡볶이로 간단히 허기를 채웠다. 그리고 각자의 텐트와 짐을 사이트로 가져와 본격적으로 피칭을 시작 했다. 아슬아슬 해가 지고 있는 캠핑장 하늘이 붉게 물들어 가고 있었다. "깡-깡-"하며 팩을 박는 망치 소리가 멀리서 들려오면, 장작 타는 냄새도 바람을 타고 조금씩 몰려온다. 하나 둘 피칭을 끝내고 나면 약속이라도 한 듯 의자에 앉아 노을을 바라보며 시원한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켠다. 그렇게 피칭의 고단함과 함께 주륵주륵 흐른 땀을 맥주로 식히며 캠핑장 특유의 고요하고 묵직한 공기를 즐긴다.


미세하게 불어오는 가을바람, 불쾌하지 않은 한낮 햇살의 따스함, 그리고 서늘한 가을밤 높이 쌓아 놓은 장작 옆 따뜻하게 타오르는 밝은 불빛을 우리는 좋아했다. 맥주와 위스키, 숯불 위에서 지글지글 구워지고 있는 고기와 따뜻한 어묵 국물까지 있다면 취하고 또 취해도 금세 다시 깨고 또 취할 수도 있었다.


어둠이 깊숙이 내린 밤, 랜턴 불빛 아래서 정숙이 주섬주섬 가방을 열고 청첩장이 든 봉투 두 장을 꺼낸다. 나와 옥순에게 봉투를 건네고 괜히 머쓱한지 잔 가득 따라져 있던 맥주를 단숨에 비워버린다. 청첩장을 요리조리 살펴보던 우리는 재미 없다는 듯 내려놓고, 어김없이 '용인 그 형님' 이야기를 다시 꺼내 정숙을 화나게 만든다. "너는 사귈 것도 아니면서 레인부츠 선물은 왜 받았냐고!"라고 말하는 옥순의 도발에 셋 다 자지러지게 웃으며 화로대에 장작을 두어 개 더 집어던졌다. 문득 옥순도 뭘 받았던 것 같지만 나는 말을 아꼈다.


다른 사이트의 사람들이 잘 준비를 하고, 화로대에 남은 불씨를 정리해 캠핑장에 점점 고요가 찾아오면, 쉴 새 없이 떠들던 우리도 소곤소곤 속삭이기 시작한다. 남은 술이 많고 남은 장작도 많고 할 이야기도 많은데 왜인지 시간만은 오늘도 부족한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 순간 분위기에 취한 것인지, 급하게 마신 위스키에 정신을 잃은 것인지 갑자기 옥순이 훌쩍이기 시작한다. 그러곤 뭐라 뭐라 이야기하는데 우리가 잘 알아듣지 못하자 옥순은 기어이 소리를 지르고야 말았다.


"정숙이 결혼하고, 영수도 내년에 결혼하면 이제 나는 누구랑 캠핑 다니냐고! 왜 나는 결혼 못하는데!"


캠핑장을 다 울리고도 남을 정도로 크게 내지른 소리에 옥순도 놀랐는지 두 눈이 휘둥그레 커지며 입을 두 손으로 막았다. 잠이 든 다른 캠퍼들이 옥순의 사자후에 깼을까 봐 정숙이와 나는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하고 대답이 돌아오지 않을 죄송함을 몇 번 외쳐야만 했다. 주변 텐트에서 킥킥하고 웃는 소리가 들렸고 우리는 어처구니가 없어 옥순에게 맥주캔을 집어던지며 말했다.


"니가 이따운데 시집가겠냐!"


날아오는 맥주캔을 피하지도 않고 몸으로 받아낸 옥순은 터져 나오는 웃음을 끅끅대며 속으로 삼켰고, 정숙이와 나도 그 모습을 보며 배를 잡고 끅끅댔다. 화로대의 불빛이 사그라들 때쯤 우리는 감기는 눈꺼풀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잠에 굴복하고야 말았다. 남은 불씨를 정리하고, 무거워진 몸을 이끌고 어두운 캠핑장 속 희미하게 빛을 밝힌 각자의 텐트로 걸음을 옮겼다. 텐트 지퍼를 열고 들어가 따뜻한 침낭 속으로 몸을 밀어 넣으며, 짧은 가을이 가져다줄 싱그러운 계절의 정취를 마음껏 즐겨야겠다고 다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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