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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롤로 Nov 21. 2023

모녀 여행기

엄마 T야?

싱그러운 바람이 불어오는 봄날이었다. 예기치 않게 퇴사와 이직이라는 일련의 사건들이 나에게 찾아왔고 나는 예기치 않게 많이 쉬는 나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5년여의 시간 동안 쉬지 않고 일했으니 지금 이 시간들이 내겐 소중한 휴가와 같이 느껴졌다. 하지만 엄마는 나와 생각이 달랐는지 한 달 여 시간 동안 딱히 하는 일 없이 집에서 빈둥빈둥 시간을 녹여내는 딸의 모습이 여간 마땅치 않은 모양이었다.


"어디 여행이라도 다녀오지? 제주도 같은 데라도 좀 다녀와라. 세끼 밥 차려 올리기도 지겨워 죽겄다."

"아, 그럴까? 엄마 그럼 같이 제주도 갈래?"


실수였다. 지난 엄마와의 여행 스토리를 통해 이미 수도 없이 많이 증명되었고, 나 또한 수도 없이 "이제 다시는 엄마랑 같이 여행 안 가!"를 시전 했지만 또다시 엄마에게 여행을 권하는 실수를 해버리고야 말았다. 엄마가 함께 갈지 말지 대답하기 전 어두웠던 과거의 기억들이 수도 없이 없이 끄집어져 나왔다. 숙소 침대를 불편해하며 집에 가고 싶다고 말했던 엄마, 가려던 식당이 문을 닫아 급하게 들어간 짜장면 집에서 젓가락을 딱 내려놓으며 "못 먹겠다"를 시전 했던 엄마, 너무나 가고 싶던 미술관이라 엄마가 싫어할 걸 알면서도 넣었던 그 미술관에서 매표를 하고서도 벤치에 앉아 한라봉 주스만 마시던 엄마 그리고 여행 내내 귀에 못이 박히도록 "이 돈 주고... 이 돈 주고... 이 돈 주고..."를 시전 했던 엄마가 생각이 났다. 내가 머릿속으로 과거의 음침했던 기억을 떠올리고 있을 때 엄마가 대답했다.


"그래. 가자"


누굴 탓하랴. 잠시 일을 쉬고 있던 나에게 세상은 너무나 아름다웠고 모든 시간들이 즐거웠기에 엄마와 마지막으로 함께 했던 지난 3년 전 여행에서 내가 얼마나 우울했고 화가 났고 진절머리가 났었는지 그새 잊고야 만 것이다.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다. 혼자 가는 여행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그리고 회사 부장님과 갔던 워크숍 계획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부장님은 굉장히 만족했던 기억이 있다.) 완벽한 여행 계획을 짜는 수밖에. 엄마를 만족시키기 위해선 그 방법뿐이다.


"엄마, 제주도 가면 뭐 먹고 싶어?"

"제주도나 서울이나 다 거기서 거기지 그냥 거기 김밥 천국 같은 데 가서 먹어도 된다 나는."

"아니 그런 데 말고 제주도에서만 먹을 수 있는 거 그런 걸 말하는 거지."

"요즘 그런 게 어딨어. 제주도에 있는 게 서울에도 당연히 있지. 그냥 김밥 같은 거 먹어도 돼."


거짓말, 저거 다 새빨간 거짓말이다. 당진 짜장면집에서 내가 받았던 수모를 난 아직도 잊지 못했는데, 이게 무슨 말인가. 엄마는 그때도 그냥 "아무 데나 가서 먹자"고 했다. 그래서 찾아간 아무 짜장면 집이었는데 엄마는 짜장면을 한입 베어 물고 마땅찮은 얼굴로 젓가락을 딱 내려놓으며 "이 돈 주고 이거 먹을 바에는 집에서 라면 끓여 먹는 게 낫겠네"라고 말해 내 가슴속에 나무젓가락으로 된 비수를 꽂아버렸다. 젓가락이 박힌 상처가 욱신거려 다시 한번 물어본다.


"아니 그러지 말고 먹고 싶은 거 얘기 좀 해보라니까. 나 혼자 계획 짜는 게 쉬운 게 아니라니까?"

"그럼 그냥 고등어조림이나 먹든가. 가서 괜찮은 식당 있으면 그냥 들어가면 되지 뭘 벌써부터 그러냐 너는"


됐다. 일단 고등어조림을 계획에 포함시킨다. 


"숙소는 내 맘대로 해도 되지?"

"그래 너 하고 싶은 데로 해라"


숙소는 어렵지 않다. 지난번 여행에서 깨달았다. 엄마는 침대에선 잘 수 없다. 온돌방으로 된 숙소를 찾는다. 그리고 여행 루트를 짠다. 당연히 미술관은 빼버렸다. 박물관도 빼버렸다. 많이 걷는 곳도 빼버렸다. 그러고 나니 갈 수 있는 곳이 많이 줄어들긴 했지만 제주도에는 그런 곳들 말고도 갈 수 있는 곳들이 꽤 많아서 걱정 없었다. 


"엄마. 이거 봐봐 여행 계획 짠 거야. 이번에는 가기 전에 다 보여줄 거니까 한번 읽어 보쇼"

"그냥 너 가고 싶은 데 따라간다니까. 뭘 계획서까지 뽑아서 갖다주냐."

"아냐, 그래도 한번 읽어봐 뭐야. 읽기 실으면 내가 읽어줄게. 첫째 날은...."


결국 짜놓은 여행 계획을 구구절절 읽어주고 엄마에게 확인을 받는다. 이러고도 만족 못하면 이제 정말 엄마랑은 더 이상 여행을 함께 할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도 내가 진심인 걸 알았는지 처음엔 건성건성 듣다가 어느새 "여긴 빼고 여기 어떠냐. 파스타? 나는 그런 음식은 잘 못 먹는다. 카페를 왜 이렇게 많이 가냐." 등 의견을 피력하기 시작했다. 뭔가 좋은 징조인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엄마와 함께 제주도행 비행기에 올라탔다.


봄날의 햇살이 도와주었는지 아니면 제주의 푸른 바다가 도와주었는지 그것도 아니라면 피톤치드 넘치는 비자림의 숲이 엄마의 마음을 유하게 만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엄마와 함께 하는 제주 여행은 그 어느 때보다도 수월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여행의 풍광과 맛있는 음식을 즐길 새 없이 엄마가 만족하는지 안 하는지 눈치를 살펴야 하는 나의 신세가 처량하게 느껴질 때도 있었지만 그 어느 때보다 수월하게 흘러가는 여행에서 나는 이미 꽤나 만족하고 있었다. 때문에 나는 되지도 않는 오기를 부렸는데, 그것은 여행 마지막 날 일정에 점심 식사를 '옥돔 정식'에서 '딱새우 파스타'로 변경한 것이다. 수많은 과거의 시행착오를 경험했음에도 또다시 실수를 범하는 나도 한낱 인간일 뿐이었다. 이 무슨 되지도 않는 오기란 말인가. 딱새우 파스타를 받아 든 엄마가 결국 투덜 대기 시작했다.


"맛도 별로 없는데 줄은 왜 이렇게 길게 서는 건지 모르겠네. 그래서 이게 한 접시에 얼마라고?"

"왜? 나는 맛있는데, 남길 거면 나 줘 내가 다 먹을게."

"남기긴 왜 남겨 이 비싼 걸. 다 먹어야지."

"..."


접시를 가져가려는 내 손을 뿌리치는 엄마의 모습이 뭔가 이상했다. 보통의 엄마라면 포크를 내려놓거나 너나 많이 먹어라 하며 그릇을 내쪽으로 밀거나, "이 돈이면..."을 시전 했어야 정상인데 서툰 포크질로 꾸역꾸역 먹는 것이 아닌가. 서툰 포크질로 파스타를 먹는 엄마의 모습이 낯설게 느껴졌지만 싫지는 않았다. 이내 파스타를 다 비운 엄마가 나직이 내뱉었다.


"아예 버릴 맛은 아니네..."


'달그락'


엄마의 그 말 때문인지, 그냥 날씨가 좋아서 그랬는지 젓가락 하나가 가슴께에서 쓱 빠져 식당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파스타를 다 비우고 입가를 닦고 있는 엄마를 보며 다음에 엄마랑 한 번 더 여행을 가도 괜찮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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