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오지게 내리던 날

브런치 첫글을 테스트하는 거심 :(

by 쥐석경
2d.jpg 어떤 겁구이

이것은 디폴트(default)다. 그 흔한 장식도 보이지 않는 미니멀리스트의 무채색 공간. 삶의 필수적 요소를 제외한 것들은 모두 정리되었다. 공간의 중량감은 보이지 않는 공기와 먼지로 대체되었고 열 평 남짓한 원룸의 세입자는 노곤해진 몸을 침대에 눕힌다. 이제 막 잠에 드려는 순간, 토닥 토닥 소리가 들린다. 5월 16일의 이른 여름비(summer rain)다.


킹갓제네럴 케이팝 그룹 여자친구(GFriend)는 만인의 여자친구가 되고 싶어서 그룹명을 여자친구로 지었다는 카더라가 있다. 여성에겐 여자친구란 친구 그 자체지만 남성에겐 연인이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는 점에서 여자친구라는 작명은 심오하다. 그것은 어쩌면 업계의 무한경쟁 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반작용의 결과일지도 모른다. 이제 막 시작하는 영세한 스타트업 기획사의 임원들이 머리를 맞대고 골몰한 것이 여자친구라는 브랜드라면 그들의 노력을 굳이 비난하고 싶지는 않다.


기르던 자라가 어항을 탈출하던 날, 여자친구는 컴백했다. 그 날은 문학 수업이 있던 무더운 여름이었다. 효(曉)는 심훈의 '그날이 오면'을 변성기도 안 거친 듯한 청아한 목소리로 읽었다. 쨍한 햇빛이 커텐을 뚫고 교실을 환하게 비추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효의 그림자가 사선으로 길게 늘어져 있었다. 그때 우리는 모두 무언가에 심취해 있었다. 그건 콘크리트 건물의 서늘함과 작열하는 태양의 뜨거움이 타협한 따스함 때문이기도 했고, 머지 않아 방학이 시작된다는 설렘 때문이기도 했다. 하루만 지나면 방학식이 시작될 터였다.


엘리베이터에는 토토로가 있었다. 나는 그를 이웃집 토토로라고 불렀다. 그는 7년 전 한국에 이민 온 일본인이었는데 본명은 니시노 코코로였다. 발음이 토토로와 비슷해 토토로로 부르다가 이웃집에 산다는 걸 알고난 뒤부터는 이웃집 토토로로 불렀다. 토토로는 복도에서 자라를 보았다고 했다. 놀란 나는 방으로 달려갔지만 자라는 없었고 영원히 돌아오지 않았다.


효에게 자라가 없어졌다고 말했다. 하지만 효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원래 자라는 길고양이처럼 집을 잘 나간다고 했다. 나는 여태껏 자라가 집을 나간다는 얘긴 못 들었다며, 자라가 집을 나가면 진진자라는 어떻게 되는 거냐고 되물었다. 효는 침묵할 뿐이었다. 나는 효가 범인이라고 확신했다.


자라를 밖에 내쫓은 이유를 물어보진 않았다. 효는 단 1분 차이로 쌍둥이 언니가 된 나를 늘 질투했으므로. 나는 피자를 먹을 때도 효보다 한 조각 더 먹었고 화장실도 먼저 쓰는 특권을 누리고 있었다. 양보하는 것은 언제나 효였다. 사실 효는 양보를 하지 않았지만 아빠는 효의 권리를 강탈해 나에게 주었다. 아빠에게 대들지 못하는 효는 그러한 상황을 이해하려 애썼고 엄마는 그런 효에게 양보를 참 잘 하는 아이라고 칭찬했다.


효에게서 무언가를 가로챌 때마다 나는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은 나의 의지가 아니었으며 아빠로부터 강제된 권리였기에 거부할 수 없었다. 겉으로는 사이가 좋아 보여도 우리 자매는 이미 회복되기 어려울 만큼 뒤틀려져 있었다. 나는 효에게 죄책감을, 효는 나에게 열등감을 가지게 되었다. 이런 관계가 지속되니 결국 자라를 버린 효에게 아무 말도 못하는 상황이 되어버린 것이었다.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를 아니? 박제가는 조선 후기 실학자래. 언제 한번 효가 그렇게 말했다. 느닷없이 이상의 소설 첫 문장과 서얼 출신의 실학자를 언급한 의중을 나는 잘 알아챌 수 있었다. 효는 서열로 결정되는 현실 세계의 논리 속에서 이상을 꿈꾸었던 것이었다.


우린 저녁에 거실에서 모처럼 오리를 구워먹었다. 엄마는 고등어를 먹고 싶다고 했지만 아빠는 미세먼지가 생길지도 모르니 차라리 오리를 먹자고 했다. 가정의 최고 의사결정자는 아빠였고 우리는 좋든 싫든 아빠의 의견에 따라야 했다. 다행히 나와 효는 오리를 좋아했다.


효가 TV를 트니 여자친구가 나왔다. 신곡(god song)인 '여름비'였다. 계절과 참 잘 어울리는 노래라는 생각이 들었다. 효는 여름비라는 제목이 은하의 본명인 정은비와 신비의 본명인 황은비와 비슷하다며 이번 노래는 은하와 신비가 센터라고 알려주었다. 하지만 나는 그 둘보다는 예린이 더 눈에 들어왔다. 효의 부드러운 인상이 예린을 쏙 빼닮았기 때문이라고, 나는 혼자 생각했다.


비는 나흘째 내렸다. 장마였다. 이불은 촉촉하고 날씨는 더워 잘 때는 아무 것도 덮지 않았다. 효 역시 이불을 덮지 않았다. 열대야 탓인지 자다가 여러 번 깼다. 유난히 긴 밤에 눈을 뜨고 있었는데 효는 나와 달리 숨소리를 내며 자고 있었다. 귀를 기울이면 효의 숨소리가 더 크게 들렸다. 문득 효가 내 옆에서 이렇게 마음을 놓고 편히 잘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비록 관계가 틀어지긴 했지만 우리는 같은 피를 나눈 자매였으며 같은 날 같은 장소에서 태어난 쌍둥이였다. 아빠와 엄마는 우릴 엄격하게 구분했지만 우리는 단둘이 있을 땐 서로에게 언니라고 부르지 않았고 동생이라 부르지 않았다. 우리는 우리 그 자체였다. 효가 나였고 내가 효였다. 효가 자라를 버린 건 아무래도 상관 없었다. 오늘부터 우리는 피보다 훨씬 끈끈한 무언가로 가까워질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2021. 05.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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