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 오랜만에 서촌 답사를 갔다.
한때 해설사로 일하던 시절, 내가 사람들을 안내하고 다녔던 곳이기도 하지만, 참가자로서 다른 사람의 해설을 들으며 서촌을 도는 건 처음이었다.
내가 참가한 답사를 주최한 곳은 '문화지평'이라는 곳이다. 문화지평은 답사, 아카데미, 미식포럼 등 인문 문화 활동을 하는 단체이다. 문화지평에서 모시는 답사 해설사분들은 역량이 탁월해서 언제나 만족 그 이상이다. 유일한 단점이라면 해설이 너무 세세하고 풍부하다 보니 답사 시간이 늘 생각보다 많이 초과된다는 것 정도이다. 나를 제외한 참가자 분들은 대부분 뒤풀이까지 가서 우의를 다지시는 것 같지만 나는 답사만으로도 이미 가슴과 머리가 차고 넘쳐 언제나 조용히 인사를 하고 먼저 집으로 오는 쪽을 택한다.
서론이 길었다.
이제 본격적으로 답사 이야기를 할 차례다.
이번 서촌 답사 코스는 다음과 같았다.
이날 답사의 해설을 맡으신 분은 조동범 시인으로 시 이외에 에세이 등 다양한 글을 발표하는 한편, 경희대 사이버대학 강의도 나가시는 중견 작가님이셨다.
오전 10시 10분 경복궁역 2번 출구 앞에서 답사를 시작했다.
2번 출구로 나오면 바로 왼쪽에 있는 세종마을 먹거리 골목으로 들어간다.
음식점과 술집이 가득한 이 골목의 대장은 단연코 '계단집'. 서촌을 찾는 사람들이 저렴한 가격에 술잔을 기울이던 식당은 이제 커져서 예전 간판이 달린 식당 맞은편에 큰 2층 건물을 다시 올렸다. 하지만 옛날 간판은 그대로 그 자리에 남아 있다. 계단집 바로 옆은 역시 이 거리의 또 다른 대표적인 식당, '체부동 잔칫집'이다. 양 많고 맛있는 국수로 유명하다.
'도시 재개발'이라고 하면 떠오르는 단어, '젠트리피케이션'. 서촌은 이 젠트리피케이션이 대중들의 뇌리에 새겨지게 된 사건이 일어난 곳이기도 하다. 이른바 '궁중족발 사건'이다. 궁중족발은 서촌에서 오래 장사를 해 왔다. 하지만 사람들이 몰려들고 장사가 잘되자 새로 바뀐 건물 주인은 월세로 300만 원에서 1200만 원으로 인상해 버린다. 이로 인해 족발집 사장님과 건물주의 분쟁이 장장 7년 동안 이어졌고 그 사이 일어난 이러저러한 불미스러운 사건들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면서 사람들은 '젠트리피케이션'이란 단어를 인식하게 되었다. 현재 예쁜 건물들이 들어서 있는 서촌의 이면에 이런 사연이 있다는 걸 알고 나면 이렇게 새 건물이 올라가는 모습이 가볍게 보이지만은 않는다.
첫 번째 답사지, 홍건익 가옥.
홍건익이라는 사람이 살았던 집이다. 단순한 한옥이 아니라 독특한 형태의 한옥의 경우, 우리 한옥의 다양한 모습을 보여 주기 위해 이렇게 서울시에서 매입해서 전시한다고 한다. 서울에 남아 있는 한옥 중에서 일각문, 우물, 빙고까지 갖추고 있는 집은 이곳이 유일하다고 한다.
홍건익 가옥은 들어가는 입구는 좁지만 일단 들어가면 겹겹이 나타나는 모습에 감탄하게 된다. 마치 복층 오피스텔처럼 대문 안으로 들어가면 2층, 그리고 3층까지 올라가게 된다. 1층, 2층, 3층, 한층 한층 올라갈수록 보는 풍경이 틀리다. 밑에서 올려다 본 한옥, 위에서 내려다보는 한옥이 있는 풍경이 모두 새롭다. 마침 전날밤 비 그친 후 구름이 쓸고 간 파란 하늘이 기와 지붕의 단아한 선과 뒷정원의 나무들와 어우러져 몹시 정겹고 아름다웠다.
두 번째 답사지는 청전 이상범 화백의 집.
이상범 화백은 동아일보 기자로 일할 당시 손기정 선수의 마라톤 금메달 사진에서 일장기를 지워버린 인물로 유명하다. 비록 그 이후의 행적은 친일로 얼룩졌지만, 해방 이후 한국 동양화계를 이끌며 많은 제자를 배출했다. 홍대 미대 교수로 재직하기도 했다.
청전 이상범 가옥은 과거 몇 번이나 왔지만, 오랜만에 오니 좀 달라진 모습이다. 실내 전시되어 있는 그림이 바뀌었고 좀 더 정돈된 느낌이었다. 하지만 마루에 걸터앉아 마지막 한학자, 이구영 선생이 쓴 '누하동천'이라는 현판 뒤로 보이는 파란 하늘은 변하지 않았다.
세 번째 답사지는 박노수 미술관이다.
이 건물은 본래 대한제국 시절, 친일파의 우두머리라 할 수 있었던 윤덕영의 별장이었다. 순종의 장인이기도 했던 윤덕영은 당시 부와 위세가 얼마나 대단했던지 지금 서촌 일대가 거의 모두 윤덕영의 땅이었다고 한다.
지금은 작고한 박노수 화백이 살던 박노수 미술관은 한국식, 중국식, 서양식 건축 양식이 모두 혼재되어 건축학적으로도 의미가 있을 뿐 아니라, 정원도 아름다워서 서촌에 오는 사람들은 '입구만이라도' 한 번씩 꼭 들르는 곳이다. '입구만이라도'라는 말을 쓴 이유는 미술관이 유료이기 때문이다. 참고로 입장료는 3천 원이고 월요일은 휴관이다.
언제 와도 아름다운 수성동 계곡이다. 경복궁 뒤 인왕산, 북악산은 예로부터 경치가 아름다워 왕족들의 별장이 여기저기 있었다. 수성동 계곡에는 세종의 넷째 아들 안평대군의 별장, '비해당'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아무리 봐도 비탈길에 집터라고 보기에는 평지가 너무 좁아 비해당은 상당히 좁지 않았을까 추측해 본다.
수성동 계곡 앞에 서면 돌다리가 보인다. '기린교'다. 무려 600년이나 된, 조선시대부터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다리이다. 겸재 정선의 '인왕제색도'에도 이 다리가 나와 있다. 60년대 이 자리에 옥인시범아파트가 있을 당시에는 아파트 입구로 들어가는 다리로 쓰였다고 한다. 복원 사업으로 원래 모습을 되찾았으니 다행이다. 지금은 많이 알려져 수성동까지 오는 관광객들은 모두 한 번씩 보고 간다.
이제 답사도 후반부로 넘어갔다.
사실 이번 답사의 핵심은 이 후반부, 수성동 계곡 이후부터였다.
윤덕영 첩 집터를 지나 골목을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면 이상하게 생긴 건물 한 채를 볼 수 있다.
마치 스페인의 가우디가 잠시 한국에 와서 지은 듯, 창틀도 비뚤비뚤, 처마 선도 구불구불하다.
한국의 가우디, 괴짜 건축가, 차운기 건축가의 12주(柱) 건물이다.
사실 건축, 미술, 시 쪽은 문외한이라 차운기 건축가에 대해 알지 못했다. 하지만 이 건물을 보니 호기심이 생기지 않을 수 없었다. 환경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재활용 자재로 이 건물을 지었다고 하는데 그 신념, 그리고 그 신념을 건축물로 구현해 내었다는 사실 자체가 대단하게 느껴졌다. 나뿐만이 아니라 일행 모두 연신 사진을 찍기에 바빴다. 어디를 어떻게 초점을 맞추어도 그림이 되는 건물이었다. 이색적이고 존재감이 있었다.
단점이라면 실거주하기에는 상당히 불편하다고 했다. 보기에는 독특하지만 실내가 네모반듯하지 않아 어떤 가구와도 어울리지 않는다고 이날 해설을 맡았던 조동범 시인이 귀띔했다.
다음에 향한 곳은 조금 더 차분한 차운기 건축가의 작품, 고칠재(古七齊)이다. 현재 사람들이 실거주하고 있는 건물이기도 하다. 주변 다세대 주택들과 확연히 다른 분위기이다. 예전에 조동범 시인이 이 건물을 답사하러 왔다가 우연히 고칠제 입주자를 만나 살기에는 어떠냐고 물어본 적이 있다고 하셨다. 별문제 없었다고 하니 고칠재는 미적으로 독특하기도 할뿐더러 실용적이기도 한 건축물인 듯했다.
어느새 3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다시 벽수산장 입구 기둥 터까지 와서 마지막 해설을 듣고 이날 답사는 끝났다.
서촌은 오래된 동네다. 한때 이곳에서는 왕족들이 풍류를 읊었고, 항일 문학가들이 술잔을 나누었으며 예술인들이 작품을 만들었다. 지금 서촌의 얼굴을 만들고 있는 이들은 누굴까? 어쩌면 이날 서촌에 발을 디디는 사람들, 살고 있는 주민들, 관광객들 모두일 지도 모른다. 내일, 모레, 10년 뒤의 서촌이 어떤 모습일 지는 모르지만 서촌이 언제나 품고 있는 고즈늑함과 여유는 언제까지나 그곳에 머무르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