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의 추억에 색을 입히다
표충사는 호국 보훈의 정신을 담은 절이다. 당장 이름에서부터 그걸 알 수 있다. 표시할 표(表)자에 나라 충(忠)자가 붙어 있으니 그 의미를 그대로 풀이하자면 '나라에 대한 충성을 보여주는' 절이다. 이름의 의미가 이보다 더 직접적일 수는 없다. 하지만 표충사가 시작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원래 이 자리에는 신라 시대 원효 대사가 세운 '죽림사'라는 절이 있었다고 한다. 그게 통일 신라 때에 '영정사'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다가 조선 헌종 때 와서는 임진왜란 때 승병을 일으켰던 사명 대사, 서산 대사, 기허 대사를 모신 표충 사당이 이곳으로 옮겨오게 되면서 절 이름도 지금과 같은 '표충사'로 바뀌게 된다.
현대에 와서도 표충사는 민주화의 중심에 서 있었다. 서슬 퍼렇던 군사 정권 시절 표충사는 명동 성당과 더불어 민주화 운동권 인사들이 몸을 피하던 사찰이었다. 그 탓에 1980년에 '법난', 즉 당시 정권이 종교계를 정화한다는 명분으로 승려들을 강제 연행, 수사, 탄압했던 사건의 피해를 입기도 했다.
표충사와 더불어 함께 보면 좋은 것이 바로 '땀 흘리는 비석', '표충비'이다. 표충비는 사명 대사를 기리기 위해 세운 비석인데 신기하게도 이 비석이 나라에 환란이 닥칠 때마다 땀을 흘린다고 한다. 지금까지 동학 혁명, 한일합방, 3.1 운동 때 땀을 흘렸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최근에 와서도 땀 흘리는 현상은 간간이 보고되었는데 가장 최근에는 바로 지난 해인 2024년에도 발생했다고 한다. 영상으로 보면 이 '땀'이란 것이 단지 비석에 맺히는 이슬 수준이 아닌, 비석이 흠뻑 젖을 정도로 물이 줄줄 흐르는 현상이다. 과학적으로도 정확히 그 원인을 밝혀내지 못했다니 신기할 따름이다. 사람들은 이를 두고 사명 대사의 영혼이 죽어서도 나라를 걱정하는 것이라고 한다. 표충비는 표충사가 아닌, 표충사에서 서쪽으로 40km 정도 떨어진 얼음골에 있는 홍제사에 있다. 아쉽게도 이번 여행에는 이 표충비까지는 보지 못했다.
이렇듯 호국의 정신을 품고 현대사의 격동을 거쳐 온 장소이지만, 우리가 찾아갔을 때는 시민들의 좋은 쉼터, 시끄러운 도심을 떠나 잠시 여유를 찾을 수 있는 산속의 좋은 휴양지였다. 경내는 넓었고 곧 다가올 수능 기원을 담은 작은 연등들이 졸망졸망 달려 있었다. 대전 앞에 큰 누각은 산과 계곡을 향해 활짝 펼쳐져 있었는데 절을 찾은 사람들은 여기에 올라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명절 연휴의 한때를 즐기고 있었다. 우리도 그 사람들 틈에 끼어 고향으로 향하는 발걸음을 잠시 쉬었다.
오랜만에 찾은 밀양은 어린 시절 희미하게 흑백으로만 남아 있는 추억에 새로 색을 입혀 주었다. 그 시절 부모님과 선생님 손에 이끌려 찾았을 때 밀양은 아무런 재미가 없는 곳이었지만 세월이 흘러 내가 스스로 찾아온 밀양은 볼거리, 먹을거리가 가득한 고장이었다. 진한 대추향만큼이나 매력적인 곳이었다. 이윽고 시간이 되어 부산으로 떠나면서도 아쉬움이 가득했다. 언젠가 또 올 것 같다. 그때는 밀양 얼음골과 표충비를 꼭 볼 생각이다. 그때 밀양은 또 어떤 얼굴을 보여줄까? 벌써부터 기대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