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추향 따라 굽이굽이
사실 나는 표충사가 첫 방문이 아니다.
부산에서 나고 자란 나에게 밀양은 쉽게 갈 수 있는 근교 나드리 코스였다. 부모님은 내가 어릴 때 표충사 계곡에 종종 가곤 하셨다는데 나는 기억나지 않는다. 학교에 들어가고 나서는 아람단이나 걸스카우트 캠프에서 표충사를 들렀던 듯도 하다. 하지만 그 나이에 으레 그렇듯 역사 유적지는 지루하고 재미없는 장소일 따름이었다. 그러니까 표충사에 가 봤다고 하지만 그것은 말뿐, 사실 이번이 첫 방문이나 다름없었다. 그래서 남편도 나도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표충사 진입로로 들어섰다.
오랜만에, 아니, 처음 보는 표충사는 밀양의 관광 명소였다. 물론 그것은 고속도로 표지판에도 나와 있을 정도이니 전혀 새로울 것이 없었지만 표충사 들어가는 길이 이렇게 길고, 가는 길에 계곡이 있으며, 또 절이 영남 알프스 자락에 자리 잡고 있는 줄은 몰랐다. 우리나라 어디든 경치 좋은 곳이 그렇듯 표충사 가는 길은 카페와 식당이 끝없이 이어졌는데, 우리가 갔을 때는 가게마다 대추를 내다 팔고 있어 진한 대추 향이 코를 찔렀다.
정말이지 나는 밀양이 대추 산지인 줄 그때 처음 알았다. 대추라고 하면 '경산 대추'만 알았는데, 생각해 보니 경산도 경북, 밀양도 경북에다가 지도상으로 두 고장은 차로 1시간 정도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다. 즉 경산이 대추로 유명하다면 밀양 역시 충분히 대추 산지일 가능성이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카페든 식당이든 가릴 것 없이 눈 닿는 곳마다 전부 대추였다. 말린 대추, 생대추, 대추즙 등. 대추가 너무 많아 평소 대추를 별로 찾지 않는 나이건만 어쩐지 사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기분까지 들었다. 그래도 혹시나 싶어 친정 엄마에게 전화했더니 내 말이 끝나자마자 말린 대추 1kg 사 가지고 오라고 하셨다. 옆에서 아빠가 '밀양 대추가 전국 제일이다'라고 하는 말도 들렸다. 더 이상 확인이 필요 없었다. 대추를 사기로 했다. 내친김에 시어머니 드릴 것, 우리가 먹을 것도 같이 샀다. 그래서 총 1kg짜리 대추를 3 개를 샀다. 1kg에 2만 원이었는데 가격이 비싼지 싼 지는 알 수 없었지만 맛있을 것 같았다. 사면서 생대추 맛도 궁금해서 아줌마에게 대추를 좀 맛봐도 되겠냐고 했더니 몇 개 쥐여 주었다. 어머나, 이렇게 달다니! 대추가 이리 단 줄도 그날 처음 알았다. 새콤달콤, 마치 작은 사과 같았다. 나무에서 직접 땄다는 석류도 한 바구니 샀는데 알이 크고 실해서 보기만 봐도 침이 고일 정도였다.
새삼 밀양이 참 살기 좋은 고장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경치도 좋고 먹거리도 풍족하니 보기만 해도 마음이 풍족해졌다. 지금에야 '살기 좋다'는 기준이 아파트가 있고 교통망과 생활 편의 시설이 얼마나 잘 갖추어져 있느냐와 같은 데에 있지만 과거 기준으로 밀양은 꽤 부촌이지 않았을까? 잠시 동안이지만 나중에 더 나이 들면 이런 곳에 내려와 살고 싶다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물론 이것은 잠시 지나가는 관광객이기에 할 수 있는 생각이다. 실제 이곳에서 산다면 뭔가 현실적인 문제로 불편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여행객이기에, 잠시 스쳐 지나가는 사람이기에 그런 현실에서 잠시 벗어날 수 있다. 눈앞의 경치를 보고 내 마음대로 상상할 수 있는 자유를 누릴 수 있다. 그게 여행이 주는 매력, 일상에서 벗어나 잠시 숨 돌릴 수 있는 자유일 것이다.
그런 나의 상상을 뿌리며 우리는 이제 정말 표충사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