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 아침의 부고

죽음이 가까워지는 나이가 되었다

by 크림동동

일요일 아침, 성당에 가는 길인데 대학 동창 친구에게 톡이 왔다.

‘K 기억나?’

‘응’

‘K가 뇌종양으로 본인상이래.’

순간 발걸음이 절로 멈춰졌다.

00과 나는 가까운 친구는 아니었다. 수업을 몇 번 같이 들은 적은 있지만 마주치면 서로 웃으며 인사하고 어쩌다 다른 친구들과 함께 어울려 다 함께 밥을 먹고 수다를 떠는 정도였다. 딱히 둘이 같이 이야기해 보거나 한 적은 없었다. 그때의 K를 생각하면 긴 파마머리에 정성껏 젤을 발라 항상 반짝반짝 윤기 머리카락이 제일 먼저 떠오른다.

대학 졸업 후 우리의 진로는 갈렸다. 나는 취업을 했고 진작부터 사시를 준비하던 K는 2번인가 3번의 시도 끝에 그 어렵다던 시험에 붙었다. 내가 결혼한 뒤 언젠가 있었던 동창 모임에서 K를 다시 보게 되었다. 그때 그녀는 연수원에서 만난 사람과 결혼했으며 덧붙여 이름을 바꾸었다고 했다. 그녀가 변호사이며 남편 역시 변호사라는 사실보다 그녀의 개명 소식이 더 놀라웠다. 이름을 바꿀 정도로 K가 자기 이름을 싫어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K는 어떤 애였던 걸까? 생각해 보면 나는 정말 K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다. K는 자신의 새 이름을 알려 주었지만 낯선 이름은 영 입에 붙지 않았고 곧 기억 속에서 사라졌다. 그래서 나에게 K는 언제까지나 K였다. 그것이 K와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그 이후 K의 소식은 들은 일이 없었다. 최소한 이날까지는.

갑작스러운 K의 부고에 허망하고 헛헛했다. 최근 들어 점차 누군가의 죽음 소식이 잦아진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아직까지는 아버지, 어머니, 시아버지, 시어머니처럼 부모님 세대가 가셨다는 소식이었다. 하지만 어느새 죽음은 곁에 한층 다가와 있었다. 지난주 아파트 바로 옆 동에 사는 성당 옆 반 반장님의 남편이 돌아가셨다. 고작 65세였다. 65세면 요즘처럼 수명이 길어진 세상에 한창 때다. 너무 이른 나이에 가셨다며 성당 사람들 모두 황망해했다. 그래도 65세면 아직 나보다 위였다. 그런데 1주일 사이에 동창의 죽음을 전해 들은 것이다. 이제 우리 세대다. 죽음이 어느새 이토록 나 가까이에 와 있었다. 내가 나이를 먹었다는 게 이토록 실감 날 수 없었다.


나는 K의 조문은 가지 않았다. 처음 소식을 들었을 때는 당장 달려가고 싶었다. 하지만 K와 나는 사실 거의 모르는 사이나 다름없었다. 대학 시절이나 그 이후로의 친분을 떠올려봐도 서로 ‘친구’라 할 만한 추억은 별로 떠오르지 않았다. 단지 ‘동창’이라는 끈으로 연결되어 있을 뿐이었다. 이런 마음으로 장례식에 간다면 장례식을 핑계 삼아 오랜만에 옛 대학 동창들이나 만나고 올 것 같았다. 고인의 비극적인 죽음 앞에 그것은 도리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대신 나는 나만이 할 수 있는 일을 했다. 미사를 드리며 K의 영혼을 위해 기도를 올렸다.


11월은 가톨릭력으로 ‘위령성월’이다. 돌아가신 이들의 영혼을 위해 기도하는 달이다. 죽은 이들의 안식을 위해 기도한다는 건 남아 있는 자들을 위한 위로이기도 하다. 11월은 매해 돌아오지만 올 11월만큼 위령성월의 의미가 진하게 다가왔던 때는 없었다. 나는 K의 영혼을 위해 기도하며 내가 아는 돌아가신 영혼들, 시아버지, 친구들, 지인을 위해서도 기도했다. 그리고 또 남아 있는 가족들의 아픔을 위로해 주시기를 청했다. 그것이 장례식장에서 절하는 대신 내가 K를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의 조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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