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는 남산이 있다. 남산은 서울의 중심이다. 지리적으로도 그렇고 역사적으로 그렇다. 외국인이 서울에 와서 가장 먼저 보는 것이 남산과 남대문이다. 남산은 서울의 얼굴이다.
경주에도 남산이 있다. 경주는 천 년 역사 신라의 수도였다. 그러고 보면 한 나라의 수도가 되려면 ‘남산’이라는 산이 하나 있어야 하나 보다. 하지만 경주 남산은 서울 남산과 여러모로 다르다. 관광지에서도 거리가 좀 있을 뿐만 아니라 잘 모르는 사람들도 많다. 대개 사람들은 ‘경주’하면 ‘불국사’, ‘석굴암’, ‘첨성대’를 떠올린다. 요즘은 ‘황리단길’을 먼저 떠올리는 경우도 많다. ‘경주 남산’이라고 하면 ‘응?’ 하는 반응을 보인다.
그렇다고 경주 남산이 시시한 곳은 아니다. 오히려 반대다. 신라 천 년의 역사를 지켜보고 함께 한 곳이 바로 남산이다. 설화에 따르면 지금으로부터 천 년 전, 남산 기슭에 있는 우물가에서 말 울음소리가 들려 사람들이 가 보니 말 옆에 커다란 알이 있었고 말은 하늘로 날아갔다고 한다. 그 알에서 나온 이가 바로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이다. 박혁거세가 세운 작은 나라였던 신라는 힘을 키워 이윽고 삼국을 통일한다. 신라 전성기 남산은 불교의 중심지였다. 산 전체가 수많은 사찰과 탑으로 빼곡했다. 지금도 산에 오르면 곳곳에서 마주치는 불상과 탑들, 절터는 당시의 흔적들이다. 그러나 달도 차면 기우는 법. 천 년의 세월을 거쳐오며 신라는 국운이 쇠했다. 약해진 신라는 다시 쪼그라들어 옆 나라들의 침공에 시달린다. 후백제의 견훤은 수도 경주까지 밀고 들어와 신하들과 연회를 즐기고 있던 경애왕을 사로잡은 후 자결을 강요한다. 경애왕이 연회를 즐겼다는 바로 그 자리, 포석정 역시 남산에 있다. 이렇게 남산은 신라 천 년 역사의 생생한 현장이다. 문화재청에 따르면 실제로 남산에는 100여 곳의 절터, 80여 구의 석불, 60여 기의 탑이 있다고 한다. 남산이 ‘노천 박물관’이라고 불리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개인적으로 경주 남산에는 세 번 갔다. 처음 간 건 대학교 사학과 답사 때였다. 처음의 인상을 잊을 수가 없다. 특색이랄 것 없는, 그냥 산이었다. 굳이 따지자면 이름이 서울 남산과 같다는 게 특이했다. 그런데 산길을 조금 걸으면 석불이 나타나고, 또 조금 가면 탑이 나타났다. 신기했다. 절에 있어야 할 석탑과 석불들이 마치 산의 일부인 양 나무와 바위 사이에서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런데 그 조합이 편안하고 자연스러웠다. 남산 곳곳에 이런 유물과 유적들이 있다는 짧은 설명은 호기심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경주에 이런 곳이 있었나?’ 떠나면서 언젠가 다시 와서 남산을 제대로 보리라 결심했다.
그 결심이 이루어지는 데 30년이 걸렸다. 그사이 20대의 대학생은 50대의 아줌마가 되어 버렸다. 남산을 두 번째 간 그날, 아침부터 비가 내렸다. 오랜만의 경주, 그보다 더 오랜만의 남산, 이젠 기억에도 희미한 낯선 길에 비까지 더해지자 잠시 망설였다. 이런 상황에 굳이 남산을 오르는 게 맞는 걸까? 하지만 망설임은 잠시, 곧 가기로 마음먹었다. 또 언제 남산을 오게 될까? 남산 하나를 보기 위해 온 경주행이었다. 비가 방해되기는 했지만 이대로 돌아설 수는 없었다. 빗발이 너무 심해지기 전에 갈 수 있는 데까지만이라도 올라가 보기로 했다.
비에 젖은 산은 더욱 조용했다. 30년 전에는 답사 버스에 실려 갔기에 가는 길은 전혀 기억에 없었다. 등산로 입구에서도 어리둥절하기만 했다. 그러나 삼릉을 지나 산에 들어서자 차츰 낯선 감이 사라졌다. 석불이 나타났다. 오르막을 더 가자 석탑이 나타났다. 30년 전 답사 때 봤던 그 석불, 석탑인가? 어렴풋한 기억으로는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었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남산에 다시 와서 그 길을 걷고 있는 것 자체가 감격스러웠다.
우산을 때리는 빗소리가 제법 커지기 시작했지만, 아직 몸을 돌리기에는 아쉬웠다. 이렇게 남산을 독차지하는 경험을 언제 또 해 볼 것인가? 비가 와서 오히려 좋았다. 지나가는 사람 없이 홀로 서서 바위에 새겨진 부처의 모습들을 보고 있자니 시간이 잊혔다. 천 년 전 신라 사람들과 같이 같은 걸 보고 같은 공기를 마시는 기분이었다.
산을 내려와 버스를 타며 또 언제 오게 될까 생각했다. 그런데 그 ‘언제’는 생각보다 빨리 왔다. 지난 추석, 부산 친정에 갔다가 올라오는 길에 경주에 묵으며 다시 남산에 갔다. 이번에는 남편도 함께였다. 서울내기엔 남편에게 경주의 속살, 남산을 꼭 보여주고 싶었다.
그러나 세 번째 방문은 좀 실망스러웠다. 그 사이 남산이 많이 알려져서 그런 건지, 비가 오지 않아 그런 건지 이번에는 등산객이 많았다. 고즈넉하게 산을 즐길 수가 없었다. 게다가 비 오기 전 습기로 공기는 후덥지근했고 남편은 헉헉거렸다. 결국 예상보다 많이 올라가지도 못하고 서울로 올라갈 고속도로 정체가 걱정되어 서둘러 내려와야 했다.
남편에게도 남산의 감동을 알려주고 싶다는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더 아쉬운 건 남산이 더 이상 나만의 성지가 아니게 되었다는 거다. 얼마 전 경주에서 열린 APEC라는 큰 행사로 남산도 여기저기 많이 소개되었다. 이제 경주 남산은 더 이상 소수의 전유물이 아니다. 물론 남산이 경주의 보물로 널리 소개되고 많은 사람이 알게 되는 것은 좋은 일이고 또 환영할 만한 일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나만이 즐기고 간직하고 싶던 곳을 이제 다른 사람도 알게 되어 섭섭한 건 어쩔 수 없다.
언젠가 또 남산을 갈 것 같다. 이번에는 정말 남산을 완주하며 찬찬히 옛 유물과 유적들을 음미하고 싶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못하더라도 좋다. 남산에 발을 딛고 그 공기를 마시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남산이 더 이상 나만의 경주 보물이 아닌 건 아쉽지만 그것이 내가 남산을 처음 갔을 때 받은 인상을 해치진 않는다. 그때나 지금이나 남산은 옛 유적과 산이 자연스럽고 편안하게 어우러진 곳이다. 옛 신라인의 마음으로 보고 숨 쉴 수 있는 공간이다. 그리고 또 혹시 아는가? 어느 비 오는 날, 남산은 또 한 번 내게 그렇게 조용히 남산의 속살을 음미할 기회를 허락할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