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수그릴'과 '까사빠보'
지인과 점심 약속이 잡혔다. 멀리서 오는 지인이라 내가 장소를 찾아야 했다. 여기저기 검색하고 주변 식당들도 대충 생각해 봤으나 마땅히 떠오르는 곳이 없었다. 이럴 때마다 참 난감하다. 주변에 이렇게 식당이 많은데도 막상 어디 가려고 하면 갈만한 곳이 없다. 곤란해하고 있는데 지인이 톡을 보냈다.
‘여기 어때요?’
지인이 언급한 곳은 ‘까사빠보’라는 곳으로 신세계 본점 6층에서 오래 있었던 유명한 일식 경양식집이었다. 명동 본점에 있던 가게는 올해 초 문을 닫았지만 대신 강남점에 연 분점은 여전히 영업 중이었다. 대충 메뉴를 훑어보니 오므라이스가 제일 먼저 눈에 띄었고 함박스테이크가 대표 음식인 모양이었다. 요즘은 식단에 신경 쓰느라 이런 음식은 잘 먹지 않지만, 지금은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식당 고민이 일시에 해결되었고 더구나 새로운, 그것도 유명하다는 식당에 가 볼 수 있는 기회였다.
‘좋지요!’
나는 시원하게 대답했다.
경양식은 오랜만이었다. 경양식은 말 그대로 ‘가벼운 양식’이란 뜻으로 주로 오므라이스, 돈까스, 함박 스테이크(햄버거 스테이크) 같은 일식 혹은 한국식으로 재해석한 단품 요리가 주메뉴다. 내가 어릴 때 경양식집은 그야말로 특별한 가족 외식 때나 가던 고급 식당이었지만 TGI나 아웃백과 같은 패밀리 레스토랑이 본격적으로 진출한 이후에는 한동안 거의 자취를 감추다시피 했다. 그랬던 것이 몇 년 전부터 레트로 열풍을 타고 다시 여기저기 식당들이 보이는 모양새다.
‘경양식’하면 나도 떠오르는 추억이 있다. 바로 부산 서면에 있던 ‘호수그릴’이다.
호수그릴은 부산에 서면에 있던 하야리야 미군 부대의 장교 클럽 세프였던 최기수 씨가 차린 식당으로 1972년에 문을 열었다. 경양식은커녕 서양 음식 자체가 귀했던 시절이라 초반에는 미군 부대에서 흘러나오는 토마토케첩을 사용해 소스를 만들 정도였다고 한다. 90년대 호수그릴의 인기는 대단해서 각종 모임과 연회 장소로 사용되었지만 IMF와 그 이후 패밀리 레스토랑들과의 경쟁에 이기지 못해 2007년 끝내 문을 닫았다고 한다.
https://www.busan.com/view/busan/view.php?code=2022100613343084110
https://www.busan.com/view/busan/view.php?code=2022052016120836703
호수그릴은 나의 첫 경양식집이었다. 외식이라곤 갈비, 냉면, 중국집 같은 곳밖에 몰랐던 어린 나에게 호수그릴은 그야말로 '고급'의 대명사였다. 지금도 생각나는 건 유럽 궁전 같은 실내 인테리어와 어두운 실내에 오렌지 빛을 던지던 조명, 하얀 식탁보가 길게 늘어져 있던 식탁과 화려한 조각 무늬가 있던 등받이가 높은 의자, 바닥에 깔려 있던 두터운 카페트, 그리고 무엇보다 넥타이와 조끼를 입고 서빙을 하던 약간 나이 든 웨이터들이다. 나는 특히 이 '웨이터'라는 존재에 기가 죽어 서빙을 받기는 커녕 옆에 올 때마다 황송한 느낌이 들었던 게 기억난다.
메뉴판에는 ‘함박 스텍(햄버거 스테이크)’, ‘비후까스(비프카츠)’ 그리고 몇 가지 음식이 더 있었지만, 엄마는 항상 함박 스텍을 시키라고 했다. 두툼하고 소스를 끼얹고 마카로니와 당근 등을 곁들여 나온 함박 스텍은 지글거리는 소 모양의 철판에 올려져 나왔는데 그 당당한 고깃덩어리의 위엄은 얇은 돈까스 따위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우아하게’ 무릎에 냅킨을 깔고 TV나 영화에서 보던 것처럼 포크와 나이프를 이용해서 그 함박 스텍을 썰고 있노라면 정말이지 내가 마치 귀족 자제라도 된 듯한 기분이었다. 고기에 앞서 나오는 수프도 특별했다. 수프는 크림수프와 야채수프, 두 가지가 있었는데 나는 항상 야채수프를 시켰다. 토마토가 들어간 야채수프는 색깔이 붉고 독특한 맛과 향을 풍겼다. 무어라 설명할 수 없는 그 향은 나에게는 너무 이국적으로 느껴져서 그것만으로도 이미 다른 나라에 온 듯 했다. 그 수프의 맛도 향은 이미 기억에 희미해져 버린 지금도 그 수프 접시를 받아들 때만의 느낌만은 여전히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을 정도다. 이렇게 호수그릴은 해외여행은 꿈도 꿀 수 없고, 서양이라는 곳을 책과 TV로만 접하던 시절에 내가 서구 문화의 끝자락이나마 접할 수 있는 곳이었다.
마지막으로 호수그릴에 간 건 어른이 된 후였다. 떨리는 마음으로 칼질이 능숙한 척 연기했던 아이는 이제 훌쩍 자라 칼질 따위 아무렇지도 않게 되었다. 하지만 나는 이렇게 자랐어도 호수그릴은 그때 그 모습 그대로였다. 어린 시절 그렇게 고급스럽게 보였던 실내는 시대에 뒤떨어져 낡아 보였고 기품 있는 집사 같았던 웨이터 아저씨는 그냥 넥타이와 조끼를 어색하게 걸친 할아버지였다. 그 모습이 서글프게 다가왔고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까 나로서도 걱정이 되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호수그릴이 여태 있는 사실이 감사했다. 고향을 떠나 이방인으로 산 세월이 이미 수십년, 세상은 너무 빨리 변하고 나 역시 그러했다. 그러는 와중에도 옛 모습 그대로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무언가는, 비록 그것이 아무리 낡았더라도 안정감을 주었다. 여전히 과거와 현재의 나를 이어주고 돌아갈 곳이 있다는 든든함을 주었다.
몇년 후 기어코 호수그릴이 없어졌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미 예감하고는 있었지만 가슴이 텅빈 듯 아쉬웠다. 마치 어린 시절 곁을 지키던 친구가 떠나간 느낌이었다.
그래서 오랜만의 경양식집 나들이가 기대되었다. 요즘의 경양식집이자 서울의 경양식집, 그것도 일반 경양식집이 아니라 유명한 고급 경양식집은 어떨까? 그곳의 함박 스테이크는 과연 어떤 맛일까? 여러모로 호수그릴이 떠올랐다.
결론만 이야기하자면 까사빠보는 호수그릴과는 결이 다른 식당이었다. 과거 까사빠보를 가 본 적이 없어 원 모습에 대해서는 이야기할 수 없지만 내가 간 까사빠보는 시대의 흐름에 맞춰 영리하게 변신한 트렌디한 경양식집이었다. 일단 외관부터가 신세계 강남점 지하의 파이브 가이즈 옆에 자리한 탁 트인 공간이었다. 호수그릴과 같은 어둡고 중후한 분위기와는 애초부터 틀렸다. 밝고 경쾌한 분위기는 어른들의 자리라기보다는 젊은 세대까지 아우르는 공간으로 거듭나겠다는 의도로 보였다. 음식 역시 마찬가지였다. 시그니처인 오므라이스, 함박 스테이크 외에도 젊은 층의 일식에 대한 선호를 고려해 고등어 소바, 자루 소바 등 경양식보다는 좀 더 일식에 가까운 메뉴들을 새로 첨가했다. 이 역시 젊은 층을 끌어들이려는 시도로 보였다. 이러한 신메뉴에 호기심이 생겨 지인과 나 역시 처음에 생각했던 시그니처 메뉴가 아닌 소바를 주문해 먹었다. 메밀 함량이 높은 소바의 맛은 괜찮았지만 결과적으로 까사빠보의 오므라이스와 함박 스테이크 맛에 대한 평가는 다음으로 미룰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까사빠보가 전체적으로 경양식집으서의 정체성을 버리고 젊은 층에만 의존하는 가벼운 식당으로 변신했다고 말하기는 힘들다. 예전 고급 경양식집의 모습도 찾아볼 수 있었다. 호수그릴처럼 넥타이에 조끼를 입은 웨이터는 아니지만 정장을 입고 서빙하는 직원들은 확실히 좀 더 정중한 분위기를 풍겼다.
전체적으로 볼 때 까사빠보는 호수그릴과 달리 경쟁에서 살아남은 걸로 보인다. 아마 더 오래갈 지도 모른다. 물론 이 치열한 요식업 전쟁에서 얼마나 오래 갈 지는 누구도 점칠 수 없지만 까사빠보의 변화를 받아들이려는 자세는 긍정적으로 보인다. 행여 유행을 쫓다가 섣불리 자신의 정체성을 포기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기만을 바란다.
물론 식당에 대한 평가는 음식으로 해야 한다. 그러므로 정확한 까사빠보에 대한 평가는 함박 스테이크를 맛보기 전까지 미루는 게 공정하다. 하지만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든다. 굳이 다음에 또 가서 까사빠보의 함박 스테이크를 먹어야 할까? 나는 이미 최고의 함박 스테이크를 먹었다. 호수그릴의 함박 스텍이다. 이 세상 어떤 함박 스테이크가 와도 내 추억 속, 고급진 당당한 그 함박 스텍을 넘을 수는 없다. 그걸로 충분하지 않을까? 그래서 까사빠보 재방문은 아직 미정이다. 언젠가는 갈 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더라도 크게 아쉽지는 않을 것 가타다.
마지막으로 부산의 호수그릴은 2007년 없어졌지만, 2002년 그곳의 주방장이 삼천포에 따로 차린 ‘레스토랑 호수’는 아직 영업 중이다. 옛 호수그릴의 모습을 많이 담고 있고 메뉴도 그대로인 모양이다. 삼천포까지는 먼 길이지만 이곳이야말로 언제 기회가 된다면 한번 가 보고 싶다. 이게 바로 추억의 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