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나가는 것'의 위대함
인생이란 무엇일까? 어려서는 위인전을 읽으며 컸다. 나폴레옹, 이순신 장군, 헬렌 켈러 등 역경을 극복하고 우뚝 선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으며 나도 크면 그런 인물이 될 거라고 믿었다. 어른이 되어 마주친 삶은 녹록지 않았다. 현실의 벽 앞에서 처음의 꿈은 깎여나갔고 하루하루 살다 보니 예전에 그런 꿈을 꾸었다는 사실조차 희미해졌다. 숨 가쁘게 살아오다 돌아보니 어느새 인생 중반, 그 사이 결혼과 자녀 양육 같은 큰 숙제는 끝냈다. 그런데 어쩐지 허무하다. 열심히 산 것 같은데 남은 게 없다. 재산을 크게 일군 것도 아니고 출세를 한 것도 아니다. 처음이나 지금이나 소시민, 눈에 띄지도 않고 보잘것없는 존재 그대로다. 뭐 하며 살아왔나 싶다.
중국 작가, 위화의 장편 소설, "인생"은 이러한 우리네 삶에 위로를 주는 이야기이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부잣집 도련님으로 태어난 주인공, 푸구이는 젊은 시절 노름에 빠져 재산을 탕진하고 그 충격으로 아버지도 돌아가신다. 하루아침에 가난뱅이가 된 푸구이는 어떻게든 살아보려 하지만 격동기의 세상은 그를 가만히 두지 않는다. 국민당과 공산당과의 전쟁 와중에 푸구이는 강제로 징집되어 끌려갔다가 겨우 집에 돌아온다. 그 사이 어머니는 돌아가시고 딸 평샤는 병으로 청력과 목소리를 잃었다. 국공내전이 공산당의 승리로 겨우 끝나나 했지만, 공산 정권의 수립, 곧 이어진 대약진 운동과 문화 대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푸구이 가족은 이리저리 휩쓸린다. 아들 유칭은 과다 수혈로, 딸 펑샤는 출산의 와중에, 사위는 일 하던 중 사고로, 손자 쿠건은 콩을 먹다가, 자전은 병으로, 이렇게 가족들은 차례로 그의 곁을 먼저 떠난다. 눈물도 나오지 않을 것 같은 불행의 연속에서도 푸구이는 결국 마음을 추스르고 다시 살아나가는 법을 배운다. 그는 오히려 이제 더 이상 가족들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자기가 죽으면 가족들이 자신들을 맞아줄 것이라고 마음 편하게 생각하기로 한다. 소설은 말미에 노인이 된 푸구이의 모습을 비춘다. 그는 남은 돈을 그러모아 늙은 소 한 마리를 산다. 자기와 똑 닮은 그 소에 푸구이는 자신의 이름을 붙여주고 가족들의 이름을 차례로 부르며 밭을 간다. 하루 일이 끝나고 소와 함께 석양 속으로 사라지는 푸구이의 모습은 긴 여운을 남긴다.
인생이란 무엇일까? 화려하고 빛나는 것만이 인생은 아니다. 푸구이와 자전이 온갖 삶의 풍파 속에서도 끈질기게 살아가는 모습은 묘한 울림을 준다. 그 끈질긴 생명력, 그 자체가 감동적인 것이다. 어쩌면 이것이 수많은 사람들이 지금껏 살아온 방식일 것이다. 바람이 불면 바람이 부는 대로 숙이고 바람이 지나가면 다시 고개를 드는 풀처럼 이름 모를 수많은 생명들이 그렇게 이 땅을 살아왔다. 풀은 한 포기, 한 포기 들여다보면 볼품없지만 대지를 푸르게 만드는 건 풀이다. 폭풍우에도 꺾이지 않고 살아남는 건 큰 나무가 아니라 힘없이 흔들리는 것처럼 보이는 풀이다. 그래서 대지의 주인은 우뚝 솟은 나무가 아니라 풀이다. "인생"이 그리는 것은 그런 풀과 같은 우리네 사는 모습이다. 끈질기게 살아나가는 그 자체만으로도 의미가 있다고 한다. 그래서 이 책이 위로가 된다.
언젠가부터 서점에 나가면 눈에 띄는 건 위인전이 아니라 삶을 위로하는 책이었다. 지친 이들에게 쉬라고 하고, 특별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하고, 오늘 하루도 수고했다고 하는 제목을 단 책들이 여기저기 눈에 보였다. 그런 책들이 많아졌다는 건 그만큼 다들 사는 게 힘들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그런 우리들에게 "인생"은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던진다. '삶이란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것이다. 어제의 좋은 일이 오늘의 나쁜 일이 될 수도 있고, 어제의 나쁜 일이 오늘 좋게 변하기도 한다. 중요한 건 살아있는 것이다.'
살아나간다는 생명력, 평범해 보이지만 그 담담한 위대함을 이야기하는 책, 그 책이 위화의 "인생"이다. 삶에 위로가 필요한 모든 이들에게 추천할 만하다.
"내 한평생을 돌이켜보면 역시나 순식간에 지나온 것 같아. 정말 평범하게 살아왔지. 아버지는 내가 가문을 빛내기를 바라셨지만, 당신은 사람을 잘못 보신 게야. 나는 말일세, 바로 이런 운명이었던 거라네. 젊었을 때는 조상님이 물려준 재산으로 거드름을 피우며 살았고, 그 뒤로는 점점 볼품 없어졌지. 나는 그런 삶이 오히려 괜찮았다고 생각하네. 내 주변 사람들을 보게나. 룽얼과 춘성, 그들은 한바탕 위세를 떨치기는 했지만 제 명에 못 죽었지 않은가, 사람은 그저 평범하게 사는 게 좋은 거야. 아옹다옹해 봐야 자기 목숨이나 내놓게 될 뿐이라네. 나를 보게나. 말로 하자면 점점 꼴이 우스워졌지만 명줄은 얼마나 질기냔 말이야. 내가 아는 사람들은 하나가 죽으면 또 하나가 죽고 그렇게 다 떠나갔지만, 나는 아직 살아 있지 않은가. (p. 278-27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