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방으로 꽉 채운 1박 2일
아들과 둘이 1박 2일 부산 친정 나들이를 했다. 남편은 연말 회사일과 모임에 지쳐 빠지겠다고 일찌감치 선언했다. 살짝 마음이 상했지만 건강 염려증에다가 아저씨 입맛 소유자인 남편이 빠지면, 내 입맛을 그대로 빼다 박은 아들과 먹고 싶은 건 마음대로 먹을 수 있잖아? 러키비키! 오히려 좋다. 그래서 이번 여행은 명색은 ‘친정 나들이 겸 아들의 외가 방문’이지만, 테마는 ‘내 마음대로 먹어보는 부산 여행’ 쯤 되시겠다.
부산역에 내리자마자 제일 먼저 향한 곳은 깡통시장. 아들에게 진정한 부산의 분식 맛을 보여주려면 깡통시장으로 가야 한다. 깡통시장 어묵 골목에 가면 사람들이 모여 있는 분식점이 있다. 사람이 많다는 건 맛있는 집이라는 의미. 간판도 제대로 보지 않고 우리도 그 집으로 들어갔다. 아뿔싸, 자리가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포기하기엔 이르다. 자고로 어묵꼬지란 서서 먹는 게 제맛이다. 그래서 우리도 분식점 앞에 서서 뜨끈한 어묵꼬지를 먹었다. 맛있는 국물을 듬뿍 머금은 두툼한 어묵을 한 입 베어 물면 잠깐이지만 겨울을 사랑할 수 있다. 그 정도로 어묵꼬지는 겨울과 잘 어울린다. 게다가 부산에서는 어묵 국물이 무료인 데다가 몇 번이고 리필도 된다. 서울 출신 아들이 제일 놀란 게 바로 이 넉넉한 어묵 국물 인심이다. 이게 바로 부산의 정이란다. 어묵꼬지(1,500원) 외에 떡볶이(5,000원), 튀김도 너무 맛있어 보였지만 분식점을 1차로 하고 국제시장 분식 포장마차로 2차를 갈 생각이었기 때문에 뱃속에 자리를 남겨 두어야 해서 참았다.
그렇게 해서 간 2차. 여기서도 어묵꼬지(1,000원)를 하나씩 먹어준 다음 떡볶이(4,000원)와 만두(4,000원)를 모둠으로 시켰다. 아, 그런데 실망이다. 돈은 조금 더 줘야 하지만 깡통시장 어묵 분식점이 여러모로 낫다. 더 받았지만 어묵도 좀 더 맛있었고 떡볶이 떡도 더 굵은 제대로 된 가래떡이었다. 하지만 다시 거기까지 돌아가기에는 엄두가 안 났다. 무엇보다 이미 시킨 걸 어쩌랴. 그래도 이 기회에 아들에게 부산 길거리 분식의 맛을 보여주었다는 데 의의를 둔 걸로 만족하기로 했다. 혹시 부산에서 떡볶이와 어묵꼬지를 먹는다면 국제시장 분식 포장마차보다는 깡통시장 분식점으로 가기를 추천한다.
식사를 했으면 커피를 마셔야 하는 법. 국제시장에는 아이리쉬 커피를 제대로 만드는 집이 있다. ‘레귤러 하우스’다. 예전에 우연히 알게 되어 찾아갔는데 그 이후 남편도 데리고 가고, 이번에는 드디어 아들도 데리고 가게 되었다.
카페 안에 사람은 많았지만 다행히 바 좌석으로 앉을 수 있었다. 실내가 어두워 진짜 아이리쉬 펍 같은 분위기가 나는 곳이라 바 좌석이 오히려 어울렸다.
내가 주문한 건 예전처럼 ‘아이리쉬 커피’ 약한 맛(13,000원), 카페인에 예민한 아들은 아포가토를 시켰다. 레귤러 하우스의 아이리쉬 커피는 진짜다. 양은 적지만 진하고 부드러운 생크림이 내려앉은 커피는 그 자태만으로도 검은 드레스를 입은 미인 같다. 벨벳 같은 크림과 함께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면 위스키 향이 진하게 입안에 퍼진다. 무어라 말할 수 없이 세련되면서도 강한 향이다. 하지만 언제나 첫 모금을 마시며 생각한다. ‘더 센 걸 시키지 않아 다행이다.’ 약한 아이리쉬 커피인데도 이 정도라면 강한 걸 시키면 어떻게 될까? 밤에는 어울리겠지만 낮부터 헤롱거리며 다니고 싶지 않으니 이 정도에서 참아야 한다. 교환학생 시기에 더블린을 잠시 다녀온 아들 말에 의하면 아일랜드에서 마신 아이리쉬 커피보다 더 맛있단다. 물론 아들이 주문한 아포가토도 훌륭했다.
아들과 나, 둘 다, 그리고 몇 번을 가도 좋았던 레귤러 하우스. 또 가고 싶다. 다음번엔 밤에 한 번 가 보고 싶다.
1박 2일,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이 일정을 어떻게 알차게 보낼까 하다가 해운대에 가서 아침 일출을 보기로 했다. 연말에 가족이 다 함께 이천 온천에 가기로 했지만, 그곳은 내륙이고 해운대는 바다다. 새해를 맞기엔 조금 이르지만 미리 해변에서의 일출을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잠에 취한 아들을 흔들어 깨워 택시를 타고 해운대로 향했다. 목적지는 그랜드조선 호텔. 당연히 호텔에 숙박하러 가는 건 아니었다. 호텔 2층에 스타벅스가 있는데 주말에는 7시부터 문을 연다고 했다. 그 말은 곧 스타벅스에서 커피를 마시며 일출을 볼 수 있다는 말이다. 스타벅스에서 커피를 마시며 일출을 구경할 욕심에 서두른다고 서둘렀지만, 그래도 좀 늦었는지 이미 가는 길에 하늘이 훤하게 밝아오는 게 보였다. 아쉽게도 일출은 놓쳤지만 그래도 바다 위로 떠 있는 해는 근사했다.
예로부터 해운대는 온천으로 유명한 곳이다. 기왕 해운대에 온 김에 온천욕을 하고 돌아가기로 했다.
여러 사우나 중 우리가 간 곳은 ‘해운대 온천센터’였다. 위치는 해운대 구청 바로 앞이라 찾아가기도 쉬웠고, 건물도 깨끗하고 리뷰도 좋았다. 해운대 온천센터는 두 군데로 나뉘어 있는데 하나는 일반 대중탕이고 또 하나는 ‘할매탕’이었다. 둘 사이의 차이점이라면 할매탕에는 대중탕 외에 가족탕도 있고 샴푸, 비누 등 비품이 제공된다고 했다. 가격은, 온천센터가 10,000원, 할매탕은 13,000원으로 할매탕이 조금 더 비쌌다. 우리는 대중탕으로 갔다.
해운대 온천센터는 전반적으로 만족스러웠다. 공간도 크고 널찍하고, 시설도 깨끗했다. 탕도 뜨거운 탕이 3개, 냉탕도 컸고 중간중간에 몸을 씻을 수 있는 작은 탕들도 있었다. 나는 세신 서비스도 신청했는데, 가격은 30,000원이었다. 몸 구석구석을 깨끗하게 밀어주는 것은 물론 얼굴 오이팩까지 해 줘서 아주 만족스러웠다. 단, 여탕의 경우, 사람들이 비품을 많이 가져가는지 샴푸는 물론 기본 비누도 없었고, 심지어 수건 한가운데에는 '사용 후 제발 돌려주세요'라고 대문짝만 하게 적혀 있었다.
개운하게 몸을 씻고 나니 배가 고팠다. 아침부터 일찍 서두르느라 아무것도 안 먹은 탓이다. 할매탕(온천센터 안이 아니라 따로 있는) 맞은편에는 단팥죽집이 있었는데 가게 이름이 ‘해당’이었다. 겉에서 볼 때 가게가 깔끔하고 예뻐서 들어갔다.
국내산 팥에 알리오스만 넣어서 만든 팥죽이라는 설명이 붙어 있었다. 단팥죽 한 그릇 가격은 6,000원이었다. 놋그릇에 담겨 나온 단팥죽에는 통밤과 떡이 들어가 있고 위에는 시나몬 가루가 뿌려져 있었다. 달콤하지만 지나치게 달지는 않은, 딱 적당히 기분 좋은 달달함이었다. 단팥죽과 함께 내 온 물은 보리차가 아니라 ‘무차’였다. 무차는 처음 마셔보는데 소화와 감기에 좋다고 한다. 테이블 옆 선반에는 시식용 쥐눈이콩이 담긴 통도 있어서 원하면 먹어볼 수도 있었다.
전체적으로 차분한 분위기에 모던 경성 스타일의 공간이 예쁜 곳이었다. 예쁜 공간에서 건강한 디저트를 맛있게 먹고 싶다면 한번 찾아가 보길 추천한다.
기차 시간도 촉박해서 점심에는 따로 식당을 가는 대신 전포동 수제 햄버거 맛집, ‘더프타운’에서 햄버거를 주문 포장해 와서 먹었다. 더프타운은 전리단길 수제 햄버거 가게인데 평이 좋았다. 다른 곳에 비해 특히나 육즙 가득한 두툼한 소고기 패티가 특징인 가게였다.
우리가 주문한 건 ‘클래식 디럭스(9,800원)’, ‘더프타운 앤 댄싱(10,100원)’, ‘패티 멜트(11,000원)’, 그리고 ‘칠리 프라이즈 앤 음료(7,500원)’ 세트였다. 햄버거는 한마디로 건강하고 든든한 맛이었다. 듣던 대로 패티는 두툼해서 입에 넣으려면 꽉 눌러야 할 지경이었고, 한 입 먹으면 벌써 배가 든든했다. 양상추, 토마토, 계란 등이 들어 있었는데, 마치 예전에 엄마가 집에서 해 주던 햄버거 맛처럼 전체적으로 자극적이지 않았다. 건강을 생각한다면 햄버거 번 대신 곡물 빵을 사용한 패티 멜트를 택한다면 더욱 건강한 맛을 즐길 수 있었다. 단 기대했던 칠리 프라이즈가 생각보다 별로였다. 칠리소스는 기름지고 치즈는 싼 맛이 났다. 매장에서 바로 먹지 않고 프라이와 소스를 따로 포장해 온 통에 식어서 그런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다음에 또 주문한다면 칠리 프라이즈는 시키지 않을 것 같았다.
부산을 떠나기 직전, 정말 마지막으로 달려간 곳이 초량온당이다. 초량온당은 몇 년 전, 한참 빵투어를 다닐 때 간 적이 있었다. 장소도 외관도 그때 그대로인데 종류가 더 많아진 것 같았다. 원래 크럼블이 유명한 곳인데, 요즘 제일 잘 나가는 것은 맘모스에 마카롱을 더한 ‘맘모롱’이라고 했다. 당연히 맘모롱을 먹어야 했지만, 냉장팩을 해야 하는 데다 가지고 갈 짐도 많아서 아무래도 무리였다. 대신 ‘사심 품은 픽 미 초코 쿠키(5,300원)’ 하나로 참았다. 눈길 가는 곳마다 맛있어 보이는 쿠키와 빵이 너무 많아 여유가 좀 더 있었다면 쓸어 담았을지도 모른다. 위장과 지갑에는 좋지 않았을 테니 오히려 시간이 없었던 게 다행이었다.
부산 먹방 여행의 하이라이트는 뭐니 뭐니 해도 엄마 집밥이다. 엄마는 원래도 손이 크고 음식 솜씨가 좋으신데 평소에는 살림이 귀찮다고 꼼짝도 않으시지만 자식들이 온다고 하면 괜찮다고 해도 언제나 상이 넘치게 음식을 하신다. 엄마는 맛없는 건 못 참으시기 때문에 형편이 되든 안되든 재료값에 돈을 아끼지 않으신다. 이번에도 귀한 손주 온다고 김해 주촌 축산 도매 시장까지 가서 투뿔 한우를 사 오셨다. 한우에다 안심 부위라서 고기가 그야말로 입에서 살살 녹았다. 거기다가 엄마의 김장 김치, 부전 시장에서 사 오신 입안이 가득 찰 정도로 큰 싱싱한 딸기에 김 중에 제일 맛있다는 광천김까지, 사육의 시간은 끝이 없었다. 이 진정한 포식 장면을 남길 사진을 찍는 걸 잊은 게 아쉽다.
이렇게 짧지만 알차게 1박 2일 여행을 끝내고 둘 다 오동통해져 서울로 돌아왔다. 나에게는 나고 자란 고향이고, 아들에게도 수없이 다닌 부산이지만, 여전히 구석구석 모르는 곳이 많다. 알 듯 모를 듯 찾아보면 새로운 가게가 있고 식당이 있다. 그곳들을 미처 가 지 못하고 떠나는 발걸음이 아쉽고, 그래서 또 다음을 기대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