압구정 사는 이야기-백화점
대학 시절의 일이다. 부산 출신인 나는 서울의 대학에 다니게 되어 기숙사에 살고 있었다. 하루는 서울 남쪽에 사는 외삼촌 댁에 저녁을 먹으러 가게 되었다. 기숙사에서 외삼촌 댁까지는 버스 외에는 딱히 교통편이 없었다. 아직 서울이 낯설어 지하철만 타고 다니던 때라 버스를 타고 서울을 가로지르는 건 처음이었다. 서울로 올라온 지 몇 달 되었지만 이제 막 상경한 양 창밖으로 보이는 서울 풍경은 새롭기만 했다. 그렇게 한참을 가는데 갑자기 아파트가 끝없이 보이는 거였다. ‘아파트가 참 많네’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느닷없이 백화점이 나타났다. 아파트 단지 사이에 있는 백화점이라니, 그때는 너무 생뚱맞다고 생각되었다.
지금이야 신도시가 많이 들어서서 아파트 단지 바로 옆에 쇼핑몰이나 백화점이 있는 풍경이 낯설지 않지만 내가 대학 다니던 시절만 해도 그렇지 않았다. 주거 지구와 상업 지구의 구분이 뚜렷했고 백화점이나 옷 가게, 식당 같은 상점들은 상업 지구에만 있었다. 적어도 내가 나고 자란 부산에서는 그랬다. 당시 부산에는 백화점이 한두 개밖에 없었으니 그럴 만했다고 하더라도, 대학 진학 후 올라와서 본 서울도 사정이 별반 다르지 않았다. 물론 서울에는 부산에 비해 백화점도 훨씬 많았고, 번화가처럼 보이는 장소도 여기저기 있었지만, 백화점이 번화가에 위치한다는 사실 자체는 다를 바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처음으로 아파트 사이에 백화점이 있는 걸 본 거였다. 그 광경이 어찌나 낯설었던지 그때의 이질감은 오래도록 생생하게 남았다.
짐작하겠지만 내가 본 거대한 아파트 단지는 압구정의 아파트촌이었고, 그 사이에 있던 백화점은 지금도 같은 자리를 지키고 있는 H 백화점이었다.
압구정에는 백화점이 두 개 있다. 위에서 말한 H 백화점 외에도 압구정 로데오 역 옆에 G 백화점이 있다. 공통점은 두 백화점 모두 아파트 단지와 붙어 있다는 사실이다. 압구정 아파트 단지의 끝자락에 위치한 G 백화점은 좀 덜하지만, 압구정 구역 한가운데에 있는 H 백화점은 마치 아파트 단지에 백화점이 폭 둘러싸인 것처럼 보인다. 이처럼 아파트 단지 사이에 백화점이 위치한다는 점이 실은 압구정의 백화점, 압구정의 H 백화점과 다른 경쟁사들과의 가장 차별되는 부분이다.
H 백화점의 위치는 처음 백화점이 설 때부터 화제였다. 당연하겠지만 백화점에 있어 입지 선정은 매우 중요하다. 백화점은 어차피 물건을 파는 곳이니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곳에 있어야 잡아야 매출이 오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유통 업계의 후발 주자인 H 백화점으로서는 이미 L 백화점, S 백화점과 같은 쟁쟁한 경쟁사들이 일찌감치 자리 잡은 명동, 영등포, 고속터미널, 청량리와 같은 번화가에 들어가는 건 큰 모험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대신 눈을 돌린 곳이 번화가 대신 대규모 아파트 단지 한가운데였다. 번화가를 오가는 사람들의 주머니 경제력보다 살림을 꾸리는 주부들의 구매력에 운을 걸기로 한 것이다.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H 백화점은 눈부신 산업 발전에 발맞추어 날로 성장하던 중산층의 구매력에 힘입어 압구정의 얼굴과 같은 존재로 자리 잡았다. 그뿐 아니라 주부들을 주 고객층으로 하는 백화점으로서 식품관이 특히 훌륭하다는 명성도 얻게 되었다. 그 명성은 지금도 이어져 현재도 압구정 H 백화점의 식품관에서 파는 김치와 반찬 등은 맛있다는 소문이다. 비단 음식 맛뿐만이 아니라 물건 배치, 동선, 서비스 등도 전반적으로 만족스럽다는 평이다.
그래서 그런지 H 백화점에 가면 기묘한 기분이다. 분명 백화점인데도 동네 슈퍼에 온 듯한 느낌이 같이 든다. 여기저기 보이는 비싼 그릇, 가구들을 보면 잘 차려입고 나와야 할 것 같지만, 식품관 안쪽에 맛깔난 반찬들이 여기저기 늘어져 있는 걸 보면 왠지 친숙하고 편안한 느낌이다. 아마 수십 년에 걸친 주부들의 발길이 이곳에 시장과 동네 슈퍼와 같은 숨결을 불어넣은 결과일 것이다. 그렇게 아파트와 백화점이 공생한 결과 압구정 주민들에게 이 백화점은 물건을 사는 곳을 넘어 이 지역의 랜드마크이자 애정이 서린 대상이 되었다. 그래서 경쟁 백화점들이 너나 할 것 없이 몸집을 키우고 변신을 꾀하는 요즘에 와서도, 언뜻 보기에 규모나 외관 면에서 과거와 별반 다를 바 없는 H 백화점이 그 자리를 지킬 수 있는 이유는 이러한 주민들의 사랑 때문일 것이다.
H 백화점 이외에 또 하나의 압구정에 있는 백화점, G 백화점에 대해 간단히 이야기하자면, G 백화점은 H 백화점에 비해 여러모로 다르다. H 백화점이 압구정의 상징으로서 고급스러우면서도 친숙한 이미지라면 G 백화점은 명품관 이미지가 좀 더 강하다. G 백화점은 조개껍데기를 붙인 듯한 독특하고 화려한 외관 덕에 다른 백화점에 비해 눈에 띄는데, 그에 비해 식품관처럼 생활과 관련된 쪽은 빈약한 편이다. 대신 백화점 식당은 맛있다는 평이다. 하지만 전반적으로 여타 경쟁사들에 비해 여러모로 아쉽다는 이야기가 많다. 다행히 곧 리모델링을 할 거라는 계획이 발표되었다.
개인적으로도 봐도 두 백화점은 완전히 분위기가 다르다. 두 백화점 모두 고급스럽지만 H 백화점이 편안하고 고급스러운 이미지라면 G 백화점은 아무래도 이용층이 젊다. 하지만 이건 G 백화점의 명품관 주변에 외국인 관광객과 젊은 명품족들이 항상 많이 오가는 탓에 그렇게 보이는 걸 수도 있다.
처음 아파트 단지 옆의 백화점을 봤을 때 내가 과연 압구정에 살 거라고 예상이나 했을까? 세상일은 정말 모르는 거다. 하지만 지금도 백화점 옆에 산다 뿐이지, 백화점이 나의 생활권인 것은 아니다. 나에게 집 옆의 백화점이란, 너무 덥거나 추울 때, 또는 지금처럼 연말연시에 기분을 내기 위해 잠시 들르는 ‘편리한 쉼터’ 일뿐이다. 그러나 아무리 가까이 있어 쉽게 갈 수 있다 한들, 백화점은 백화점이라는 걸 문득문득 깨닫는 순간들이 있다. 백화점 푸드 코트의 음식 가격이 눈에 훅 들어올 때, 식품관에 있는 한 알에 만 원, 이만 원씩 하는 사과를 볼 때 내가 백화점에 있다는 사실이 실감이 난다. 친숙한 듯 낯선 곳, 나에게 아파트 옆 백화점이란 그런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