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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구정이 관광지라고요?

압구정 사는 이야기-관광지

by 크림동동

'압구정'하면 늘 따라붙는 단어가 있다. '부동산', '집값'. 압구정은 늘 대한민국 부동산 시장의 중심이었다. 언론에 비친 압구정 역시 아파트로 빽빽한 모습이었다. 그래서 '관광지 압구정'이라고 하면 생뚱맞게 들릴 ㅣ수 있다. 보통 관광지라고 하면 멋진 경치나 멋진 건축물, 혹은 역사적인 유적이 있는 곳이다. 하지만 압구정에는 그런 게 없다. 오로지 아파트, 아파트, 아파트뿐이다. 이런 곳에 무엇을 보러 온다는 걸까?


관광객들이 압구정에 와서 찾는 건 당연히 아파트가 아니다. 이들은 그 맞은편 거리에 있는 수많은 병원으로 간다. 이른바 의료 관광이다. 이들의 수요는 엄청나서 압구정역에 ‘강남 메디컬 투어센터’라는 건물까지 있을 정도다. 이 건물의 원래 이름은 ‘강남 관광정보센터’였는데, 의료 관광을 오는 외국인이 늘어남에 따라 아예 센터 이름도 바꾸고 서비스도 그에 맞춰 특화시킨 거다. 하기야 이 동네의 수많은 피부과와 성형외과 간판을 보면 이곳이 의료 관광의 중심지가 된 것도 이해가 된다.

KakaoTalk_20251222_041020693_02.jpg 압구정역 6번 출구로 나오면 '강남 메디컬 투어센터'가 있다.


이들은 와서 병원만 가는 게 아니다. 화장품 가게도 가고 옷도 사고 밥도 먹고 차도 마신다. 심지어 한두 달씩 머무르기도 한다. 몇 년 전, 아직 이곳으로 이사 오기 전, 지인과 신사역 가로수길에서 만나기로 한 적이 있었다. 신사역에 갔는데 거리에 외국인이 너무 많은 거였다. 지인에게 외국인이 너무 많다고, 이게 다 한류 영향 때문인가 보다 했더니 지인 말이 그런 게 아니라 동남아, 중국 등지에서 여기 병원으로 의료 관광을 오는 사람들이 많다는 거였다. 이들은 피부 시술을 받기도 하고 코나 턱 같은 부위의 수술을 받기도 하는데, 어느 쪽이든 하루 이틀에 끝나는 게 아니기 때문에 아예 몇 주씩 방을 잡고 있다가 간다고 했다. 그래서 밤늦게 이 근처 편의점에 가면 얼굴에 붕대를 감은 외국인들이 와서 물건을 사 가는 모습도 볼 수 있다고 했다.


당시에는 재미있는 이야기라고 웃고 넘겼다. 그런데 이제 와 생각하니 의료 관광의 중심지로서의 압구정이 살아 움직이는 모습을 내가 보고 있었던 거였다. 피부과, 성형외과 간판이 너무 많다고 눈살을 찌푸리기만 했지 한 번도 저 병원들이 관광객을 끌어들이는 곳이라고 생각해 본 일이 아니었다.


평소 나는 패션이니 미용이니 하는 것은 사치스러운 것으로 치부해서 별 관심을 두지 않았다. 하지만, 이 분야는 그렇게 우습게 볼 것 아니다. 이 시장의 파급력은 날이 갈수록 커지고 있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먼저 성형외과, 피부과가 있으니 그 옆에 옷 가게, 화장품 가게가 생긴다. 사람들이 몰려드니까 예쁜 카페, 레스토랑도 함께 생긴다. 시술을 받는 동안 한동안 머물러야 하기 때문에 단기 임대 수요도 생긴다. 그에 따라 편의점, 세탁소 등 생활 편의 시설도 덩달아 돌아간다. 간단히 말해 이 지역 경제 전체가 의료 관광 수요로 돌아가는 거다.


그런데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애초에 피부과, 성형외과가 여기에 많이 생긴 이유가 뭘까? 그에 대한 실마리는 압구정 로데오 역 쪽으로 가면 찾을 수 있다. 압구정 로데오 역에 내리면 ‘K star road’라는 커다란 글씨 밑에 검은색 선글라스를 끼고 서 있는 호랑이 모양의 조형물을 볼 수 있다. 이 조형물은 요즘 말로는 ‘K 문화’, 그 이전 용어를 쓰자면 ‘한류’를 상징한다. 압구정 로데오에서 청담으로 이어지는 구역에는 크고 작은 엔터테인먼트 사가 많다. 여기서 배출된 아티스트들이 현재 K 문화를 세계에 퍼뜨리고 있다.


그래서 청담에는 명품 브랜드들이 있고 그에 이어지는 압구정 로데오 거리는 예전부터 '패션'으로 유명했던 거다. 수많은 연예인 지망생들로 인해 이 동네의 병원은 그에 따른 뷰티 분야로 특화되었고, 정형외과나 이비인후과 역시 무릎, 발목 골절 등 방송 활동 중 다치기 쉬운 부위의 진료에 집중되어 있다. 즉 우리나라의 뷰티 산업의 거대한 한 축이 압구정을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는 거다. K STAR 조형물 앞에서 흥분된 얼굴로 눈을 반짝이며 사진을 찍는 외국인, 명품을 휘감고 다니는 젊은이들은 모두 이 동네 경제가 활기를 띠고 굴러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KakaoTalk_20251222_041020693.jpg 압구정 로데오 역에 있는 K STAR ROAD를 상징하는 조형물


관광지로서의 압구정, 압구정을 떠받치는 의료 관광, 뷰티 산업에 대한 이해는 이 정도로 얼추 마무리할 수 있다. 그럼 시각을 바꾸어 이곳에 주민으로서 관광지 압구정에 사는 건 어떨까? 솔직히 좋진 않다. 이미 언급했듯이 패션이니 미용이니 하는 것에 관심 없는 사람으로서 동네가 소란스러워 불편할 뿐이다. 집이란 휴식을 취하는 공간이다. 밖에서 아무리 힘들고 피곤해도 집에서는 쉴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쉬려고 돌아온 곳이 언제나 축제 전야처럼 떠들썩하고 낯선 사람들로 북적인다면 제대로 쉴 수가 없다. 쉬는 게 쉬는 게 아니다.


묾론 처음부터 이런 분위기가 싫었던 것만은 아니다. 집에서 한 발짝만 나가면 보이는 외국인이 보인다는 게 신기하기도 했다. 명품을 휘감은 사람들을 보며 눈요기하는 재미도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언제나 여행 중인 것 같은 붕 뜬 기분에 피로해지기 시작했다. 거리는 밤낮으로 시끄럽고 차도는 꽉꽉 막혀 있었다. 집 근처를 와도 편안하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언젠가 서울의 대표 관광지인 북촌 주민들에 대한 보도를 접한 적이 있다. 1930년대의 한옥들의 모습과 그 사이 골목길이 정겨운 이 동네에 관광객이 너무 몰려들어 결국 원주민들 상당수가 떠났다는 내용이었다. 그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는 혀를 찼지만 지금 내가 그들의 심정을 이해하게 될 줄은 몰랐다. 관광지에 산다는 자각도 없었는데 알고 보니 관광지에 살고 있었고 어느새 관광지에 사는 주민들의 심정을 이해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다니 세상 일은 정말 모르는 거다.


젊은 커플들에게 압구정은 쇼핑과 외식을 즐길 수 있는 곳이고 동남아와 중국에서 들어오는 외국인에게 압구정은 미용 관광의 장소이겠지만 나에게는 쉬는 터전일 따름이다. 우리나라 경제가 잘 돌아가는 건 좋은 일이나 이곳에 사는 주민으로서의 나는 동네가 조금 더 조용해졌으면 하는 마음이다. 물론 그건 이루어질 수 없는 바람이다.


그래서 나는 요즘 이른 아침의 압구정이 좋다. 그 시간만큼은 이곳도 서울 시내 다른 주거지 못지않게 조용하다. 다행히 나는 아주 일찍 일어나고 일찍 일어난다. 새벽의 압구정을 오롯이 즐길 수 있다. 그나마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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