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품카 구경하는 재미가 있다고요?

압구정 사는 이야기-차

by 크림동동

이 동네로 이사 올 무렵의 일이다. 오래된 아파트라서 주차는 각오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귀가 아프도록 들었다. 하루는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지 보러 갔다. 그런데 평일 낮이어서 그런지 몰라도 주차장은 한산했다. 이중 삼중 주차는커녕 빈자리도 심심치 않게 보였다. 기대했던 주차 전쟁 대신 눈에 들어온 건 여기저기 주차되어 있는 외제차들이었다. 여기도 외제차, 저기도 외제차였다. 온통 외제차밖에 없는 듯 보였다. 물론 실제 그렇진 않았다. 다시 찬찬히 보니 국산차도 좀 보이긴 했다. 하지만 다 합쳐도 10대도 되지 않았다.

사실 외제차야 요즘 워낙 흔하니 외제차가 있다는 것 자체가 별로 특별할 건 없었다. 하지만 ‘압구정’에 이사 간다는 사실만으로 이미 한껏 주눅 들어 있던 때라 그날, 주차장에 가득한 외제차를 보고 한층 기가 죽었던 것 같다. 외제차도 번쩍번쩍 광이 나는 것이 하나같이 새것처럼 보이는 것이 다른 데서 보던 외제차보다 더 고급스럽게 보였다. 딱 내가 생각하던 ‘부자 동네, 압구정’의 이미지 그대로였다. ‘과연 압구정이구나.’ 반쯤은 기가 죽고, 반쯤은 감탄하며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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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와서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면 웃음밖에 나오지 않는다. 외제차밖에 없다니. 당장 지금 주차장에서 눈에 들어오는 국산차만 해도 몇 대인지 모를 정도다. 물론 대부분 중형차나 SUV처럼 덩치 큰 차들이긴 하지만 국산차는 국산차다. 심지어 경차도 보인다. 이렇게 국산차가 많긴 하지만 그때 내가 완전히 잘못 본 건 아니었다. 확실히 외제차가 많긴 하다. 아파트 안에서도 밖에서도.


압구정에 백화점이 두 군데나 있어서 그런 건지, 아니면 아파트 단지 건너편이 큰 상가 지구여서 그런지는 확실히 길에 외제차가 많다. 흔히 볼 수 있는 독일 외제차뿐만이 아니라 일본차, 미국차 등 종류도 다양하다. 그뿐만이 아니라, 일명 ‘슈퍼카’라고 불리는 차들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한 대에 수억씩 한다는 이 차들은 척 보기에도 비싸고 고급스러워 보인다. 차 디자인만으로도 눈에 띄는데 그것도 부족한지 거기에 화려한 색을 입힌 경우도 종종 있다. 마치 풍선껌 같은 밝은 분홍색, 연두색 페인트를 뒤집어쓴 듯한 파스텔톤 연두색, 자주색 차도 지나간다. 이런 차들이 지나가면 아무리 외제차에 둔감해졌다 해도 한 번씩 눈길이 가게 마련이다. 일전에 한 동네 지인은 이 동네 사니까 명품카 구경하는 재미가 있어 좋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글쎄…. 이런 차들을 보면 ‘나 좀 쳐다봐 줘’라고 온몸으로 외치는 것 같다. 그 노골적인 과시욕이 부담스러워서 집 앞에 슈퍼카가 다니는 게 좋지만은 않다.


그렇다고 외제차를 싫어하는 건 아니다. 싫을 이유가 뭐가 있을까? 디자인도 예쁘고, 고급스러워 보이고…. 나도 형편이 되면 한 대 사고 싶다. 그랬는데, 언제부터인가 나의 ‘로또에 당첨되면 사고 싶은 것들 목록’에 차가 빠졌다는 걸 깨달았다. 왜 그럴까 곰곰 생각해 봤더니 지금 있는 차로도 충분하기 때문이란 결론이 나왔다. 지금도 이상 없이 잘 굴러가는데, 그런 차를 로또 걸렸다고 바꾸느니 차라리 그 돈으로 다른 걸 하고 싶은 거다. 아무리 비싸고 예쁘다고 해도 차는 차다. 잘 굴러가는 게 최고다.


그래서 나는 슈퍼카가 딱히 부럽진 않다. 슈퍼카를 보면 갖고 싶다는 생각보다는 오히려 궁금하다. 그렇게 비싼 차를 가지고 있으면 뭐가 좋을까? 나 같으면 행여 뭐가 묻을까, 흠집이라도 날까 신경 쓰여 밖에 끌고 나오지도 못할 것 같다. 기껏 몰고 나와봐야 대책 없는 도로 정체에 갇히기 일쑤다. 그런 슈퍼카들은 뻥 뚫린 도로를 씽씽 달려줘야 멋있는 건데, 앞뒤에 차들로 뒤범벅된 도로 한가운데에서 끙끙대고 있는 게, 보는 나조차 차가 아까울 지경이다. 만약 차가 말을 할 수 있다면 그 역시 답답하다고 소리칠 거다. 차 주인 역시 이런 상황을 모르지 않을 거다. 그런데도 굳이 차를 가지고 나오는 것은 차를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 다른 모든 현실적인 불편함을 감수할 만큼 크기 때문일 거다. 결국 슈퍼카의 장점은 남한테 보여주기 좋다는 것밖에 없다는 말인데 과시욕이 그렇게도 중요한 것일까?


사람들이 부러운 눈으로 차를 쳐다보면 짜릿한 기분이 들겠지만, 남의 시선을 끈다는 게 꼭 좋기만 한 건 아니다. 얼마 전에 백화점 주차장을 막 나온 포르셰가 도로를 역주행을 해서 달려 나가는 걸 봤다. 유턴을 하기가 귀찮아 그랬겠지만 어이가 없었다. ‘포르셰까지 몰면서, 쯧쯧쯧’이라는 말이 절로 나왔다. 그런데 말하고 보니 이상했다. 역주행은 그 자체가 잘못이다. 차 종류를 따질 일이 아니다. 그런데도 굳이 말 앞에 ‘포르셰’라고 차 이름을 붙이는 거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사회적 지위가 높은 사람이거나 공인의 경우 법과 도덕의 잣대를 더 엄격하게 들이대는 경향이 있다. 이는 이들의 행동이 다른 사람에게 본보기가 되기 쉽기 때문이다. 이러한 논리는 부자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하지만 원칙적으로 법과 질서는 재산의 소유 정도에 상관없이 모두가 지켜야 하는 것이다. 부자라고 해서 더 철저하게, 가난하니까 조금 느슨하게 해도 되는 게 아니다. 그러나 머리로는 알고 있으면서도 실상은 그렇지 않다.


물론 이 자리에서 돈과 권력으로 법망을 벗어나려는 사람들을 옹호하려는 건 결코 아니다. 그런 행태는 처벌받아야 함이 마땅하다. 그러나 엄연히 모두가 지켜야 할 원칙이 있는데, 그것이 대상의 조건과 배경에 따라 공정하게 적용되지 않는 현상은 위험하다. 이런 고무줄 같은 기준은 서로에 대한 편견만 부추기는 결과를 낳는다. 예를 들어 만약 그날 역주행해서 나간 차가 포르셰가 아니라 낡은 국산 경차, 혹은 택배 트럭이었다면 어땠을까? 나는 그냥 ‘쯧’하고 지나치거나 잊어버렸을 것이다. ‘저 사람들이 그렇지 뭐’ 하면서 말이다. 그리고 그런 기억이 쌓여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편견이 만들어진다. 이러한 편견이 위험한 이유는 진실을 가리기 때문이다. 편견이 강하면 눈앞의 사실보다 머릿속에 만들어 낸 이미지를 믿게 된다. 마치 그날 주차장에서 내가 스스로 만들어 낸 ‘부자 동네’에 대한 이미지에 압도되었듯이 말이다.


그래서 나는 보여주기 위한 차는 필요 없다. 오히려 슈퍼카가 내는 엔진 소음 때문에 시끄럽기만 하다. 상전 같은 슈퍼카보다는 주차장에 자리나 항상 있었으면 좋겠다. 매번 주차 자리를 찾는 게 보통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살아 보니 주차 전쟁에 대한 이야기는 진짜였다. 만약 로또 당첨금으로 주차 자리를 살 수 있다면 차 대신 그거나 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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