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사계절의 사나이"
내가 이끌고 있는 독서 모임 “책영사”에서는 책뿐만이 아니라 영화 토론도 한다. 2026년 첫 번째 토론은 영화 “사계절의 사나이”였다.
사계절의 사나이는 “유토피아”의 저자인 토머스 모어에 대한 이야기다. 청렴하고 강직한 인물로 영국 대법관 자리에까지 올랐던 모어는 헨리 8세의 이혼에 끝내 반대하다 결국 사형을 당한다. 영화는 주변의 압력에도 굴복하지 않고 끝끝내 자신의 신념을 지키는 모어의 모습에 초점을 맞춘다. 모어의 신념이란 ‘법은 모두에게 공정하게 적용되어야 하며 그 법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작중 그는 “법을 어기지 않는 이상 악마라 해도 처벌할 수 없다”라고까지 말한다. 이처럼 무모하리만치 강직한 그의 모습은 조선 시대 선비 혹은 일제 강점기 독립투사를 연상시킨다. 제목 “사계절의 사나이” 역시 사계절 내내 변함없는 모어의 강직한 모습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 작품은 원래 연극으로 먼저 발표되어 인기를 얻었던 것으로 프레드 진네만 감독이 1965년 영화로 만든 것이다. 줄거리는 연극과 거의 동일하고 주연 배우도 연극에서 모어 역을 맡았던 폴 스코필드를 그대로 기용했다. 비평과 흥행 성적도 좋아서 1966년 아카데미 감독상, 남우주연상 등 여러 상을 수상했다.
영화에서 토머스 모어는 청렴하고 강직한 인물로 그리고 있지만 우리는 역사가 결국 헨리 8세의 의지대로 흘러갔음을 알고 있다. 지금의 시각으로 볼 때 토머스 모어가 개인적으로는 칭송받을 인물임에 틀림없지만 시대적 흐름에서 그의 태도가 과연 옳기만 했던 것인지 의문이 든다. 모든 일을 결과론적으로 처리할 수는 없으나, 만약 선한 의도를 시작한 일이라도 그 의지가 잘못된 방향으로 향햔 것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거창하게 정치인이나 역사 속 인물을 떠올리지 않더라도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선한 사람이 고집불통으로 변하는 경우를 수도 없이 본 적 있다. 영화에서 모어가 끝까지 고수하고자 했던 그의 신념은 종교적이니 신앙이었던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강직한 대법관으로서의 자기 자신에 대한 자존심이었던가? 다른 한편으로 가족의 입장도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들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원하지도 않을 고난을 함께 해야 했던 가족으로서는 그를 끝까지 지지했을까, 아니면 말리고 싶은 심정이었을까? 헨리 8세와 같은 모든 것을 가진 절대 권력이 모어와 같은 도덕적인 인물의 양심까지 원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매사를 ‘법’이라는 원칙에 따라야 한다는 태도는 존경할 만하지만, 그 법이 만약 악법인 경우에는 어떻게 할 것인가? 그 악법은 과연 누가 고칠 것인가? 영화는 이러한 다양한 논제 거리를 안겨 주었다.
새삼 60년 전의 영화를 이제 와 본다는 건 새로운 경험이었다. 화려한 볼거리와 특수 효과가 없다시피 한 옛날 영화를 본다는 건 마치 한 땀 한 땀 정성 들여 수놓은 수공예 작품을 보는 듯했다. 수려한 배경도 눈길을 사로잡는 특수 효과가 없으니 오롯이 배우의 연기에 몰두하게 되었다. 특히 연극을 원작으로 한 작품이라 영화는 더욱 연극 같았다. 배우의 눈빛과 미묘한 표정 변화, 그리고 대사 내용에 몰두하는 경험은 오랜만이었다. 덕분에 영화 속에 보이는 주인공, 토머스 모어의 태도에 대해 제대로 생각해 볼 수 있었다.
새해 첫 토론부터 역사적 소재를 다룬 옛 영화라서 조금 걱정했지만 다행히 회원들은 이번에도 즐거웠다는 평이었다. 500년 전의 일을 소재로 한 작품이지만 그 속에서 우리는 여전히 현재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역시 좋은 작품은 시간의 흐름과 관계가 없다.
(참고로 여유가 된다면 힐러리 맨틀의 “울프홀”도 함께 읽기를 추천한다. “사계절의 사나이”에 나오는 토머스 모어, 그리고 그의 대척점에 있는 토머스 크롬웰이 “울프홀”에서는 어떻게 다르게 그려지는지 비교해 보는 건 재미있는 일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