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림의 미학을 배운다
평생 코팅팬만 사용했다.
스텐팬에 대한 로망은 있었지만 사용하기 힘들다는 평이 항상 앞을 가로막았다. 한두 명만 그러는 게 아니라 모든 사람이 그렇게 말했다. 심지어 어지간한 건 막는 일 없이 다 해 보라고 하시는 시어머니까지 스텐팬만은 못 쓰겠다며 나한테 쓰지 말라고 하셨다.
그런데 요리를 하다 보니 점점 도구에 욕심이 나기 시작했다. 요리를 잘하는 건 결코 아니지만, 요리라는 게 재료와 시간, 도구에 조금만 변주가 생겨도 결과가 완전히 달라진다는 점에서 하면 할수록 재미를 느끼게 되었다. 물론 남편이 집구석 미슐랭 비평가라 언제나 코팅팬을 사용한 생선 구이나 스테이크 맛에 트집을 잡은 것도 한몫했다.
어느 때부터인가 틈만 나면 스텐팬에 대한 정보를 검색하기 시작했다. 한번 스텐팬 검색 이력을 남겼더니 이후에는 자동적으로 알고리즘이 작동해서 스텐팬 정보와 광고를 물어다 줬다. 그걸 보며 우선 집에 있는 WMF 냄비로 연습을 해 봤다. 몇 번의 실패 끝에 제법 눌어붙지 않게 음식을 조리하기에 다다랐다. 드디어 스텐팬을 살 준비가 된 것 같았다.
그런데 막상 사려고 하니 종류가 너무 많았다. 통 3중, 통 5중, 바닥 3중, 구리가 함유된 것, 스텐 304, 스텐 316 등등 어떤 걸 골라야 할 지 몰랐다. 사이즈도 고민이었다. 어느 정도 커야 할까? 28이나 30인치면 음식은 넉넉히 담기겠지만 달랑 두 식구에 너무 과한 것 같았다. 그렇다고 22인치를 사자니 생선 한마리 담기에도 부족했다. 그렇다고 사각팬을 사자니 이제껏 쓰던 동그란 팬이 무난하게 좋을 것 같았다. 이왕이면 볶음도 하게 웍을 하는 게 좋을지, 아니면 바닥이 넓은 평평한 팬이 좋을지 도무지 정할 수가 없었다. 마음 같아서야 형태와 사이즈별로 다 구비하면 좋겠지만, 그렇게 되면 보관이 큰 문제였다. 보관도 보관이려니와 아직 스텐팬을 싸 보지도 않았는데 덜컥 세트로 구매해 놓고 만약 스텐팬을 못 다루면 그땐 진짜 처치곤란이 될 게 틀림없었다. 이걸 하자니 저게 걱정이 되고, 저걸 하자니 이게 아쉽고 그렇게 며칠 동안 머리를 싸맸다.
그렇게 장고의 시간 끝에 결국 결정한 건 가성비 브랜드의 통 5중 무연마제 스텐팬 24인치였다.
마침내 기다리던 스텐팬이 도착했다. 스텐팬을 받으면 사용하기 전에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있다. 식용유로 연마제를 제거하는 거다. 물론 무연마제 제품이라고 하니까 그런 작업이 필요 없겠지만 조심해서 나쁠 건 없었다.
다행히 키친타월에 닦여 나오는 건 없었다. 이제 정말 요리를 시도해 볼 때다.
유튜브에서 본 대로 인덕션 위에 팬을 올리고 화구 세기를 강으로 올렸다. 그리고선 3분 뒤 불을 끄고 기름을 넉넉히 두른 후 1분간 기다렸다. 그 이후 다시 화력을 강으로 올린 다음 두툼한 삼치 한 토막을 놓았다. 기름이 튀고 삽시간에 팬이 거무스름해졌다. 처음의 반짝반짝 날카롭던 메탈 빛은 금방 사라졌다.
순식간에 시커매지는 팬을 보자니 마음이 착잡했지만, 생선을 뒤집는 순간 그 마음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생선이 눌어붙지 않았다!
'앗싸!'
성공이었다. 노릇노릇하게 구워진 생선은 보기에도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입맛 까다로운 남편은 밥을 푸기도 전에 생선에서 젓가락을 떼질 못했다. 그러면서 연신 엄지손가락을 세워 올렸다.
비록 팬은 엉망이었지만 기분만은 하늘을 날아갈 것 같았다.
첫 번째 성공에 힘 입어 두 번째 스텐팬 사용을 시도했다. 이번에는 첫 번째보다 불을 좀 더 줄였다. 아무래도 첫 번째 때는 불이 너무 강해 기름이 튀고 팬이 탄 것 같았다. 중불로 3분 예열 후 기름을 두르고 1분 기다렸다. 그리고 닭 모래주머니 고기를 얹었다.
'치이익~'
불은 계속 중불로 유지했다.
'치이익 치이익'. 성공이었다. 고기는 노릇노릇, 팬은 탄 자국이 좀 생기긴 했어도 처음처럼 심하진 않았다. 맛은 여전히 훌륭했다. 남편은 이번에도 '맛있다'를 연발했고, 설거지도 지난번보다 간편했다.
뿌듯했다. 이제 스텐팬 사용이 두렵지 않았다.
스텐팬의 유일한 단점이라면 사용 전에 기다려야 한다는 것뿐이다. 하지만 다르게 생각하면 그건 단점이 아니다. '빨리 빨리'가 일상이 된 세상이지만, 원래 맛있는 요리는 만드는 데 시간이 걸린다. 재료가 익고, 그것도 맛있게 익는 데는 어느 정도 시간이 필요할 수밖에 없다. 급하다고 그 시간을 건너뛰면 맛은 포기할 수밖에 없다. 현대 음식 문화는 그 시간을 줄이면서 맛을 그대로 보존하기 위한 투쟁과 다름 없다. 코팅 팬으로 팬이 달구어지는 시간을 줄이고, 패스트푸드로 조리 시간을 단축한다. 배달로 아예 '조리 시간'이라는 걸 없애 버리기도 한다.
하지만 스텐팬은 기다려야 한다. 팬을 달구고 식히고, 그 시간을 지키지 않으면 음식이 되지 않는다. 제대로 예열된 스텐팬에서 구운 고기와 생선은 훌륭한 맛을 내지만, 급한 마음에 서둘러 재료를 얹으면 그 재료는 팬에 눌어붙어 버린다.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다. 아무리 마음이 급해도 기다려야 하는 것이다.
팬이 예열되기까지 기다려야 하는 3분은 생각보다 길었다. 그리고 또 1분을 다시 기다려야 했다. 처음에는 인덕션의 시계 숫자만 노려보고 있었다. 하지만 어느새 그 사이 나는 숨을 쉬고 마음을 가다듬고 있었다.총 4분의 시간, 그게 뭐라고 그렇게 서둘고 싶었을까?
스텐팬은 나에게 기다림의 미학을 가르쳐 주었다. 그와 동시에 맛의 즐거움을 배가시켜 주었다. 이젠 스텐팬이 두렵지 않다. 앞으로 시도할 요리의 세계가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