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송 솔샘온천
어른이 되면 어릴 때 하지 않던 걸 하게 된다. 목욕만 해도 그렇다.
어릴 땐 목욕을 싫어했다.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면 숨이 막히고 가슴이 답답했다. 그래도 엄마는 아랑곳 않고 때를 밀려면 몸이 불어야 한다며 숫자를 100까지 세고 나오라고 했다. 나는 조금이라도 빨리 나가려고 ‘일, 이, 삼…’, 숫자 대신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를 열 번 웅얼거리고 탕 밖으로 나와버렸다.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이란 문장에 글자가 10개 들어 있으니까 숫자 열 개를 세는 거나 다름없다는 논리였다. 당연히 엄마한테는 통하지 않았다. 엄마는 무서운 얼굴로 뭐 이렇게 빨리 나왔냐며 다시 탕 속으로 밀어 넣곤 했다. 뜨거운 탕과 살갗이 벗겨질 것만 같은 때밀이. 그게 어린 시절 목욕탕에 대한 나의 기억이었다.
그러던 아이가 어느덧 커서 전국의 좋다는 온천은 다 찾아다니고 있으니 세상일이란 참 모르는 거다. 아마 더 이상 옆에서 뜨거운 물에 집어넣는 엄마도, 때 타월의 공포도 없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전국에 알만한 온천은 대충 다 가 봤다고 생각하는데도 찾아보면 또 새로운 온천이 나타난다. 우리나라가 화산 지대도 아닌데 이렇게 온천이 많았나 싶다. 이렇게 보면 우리나라도 작지 않은 것 같다.
온천 여행의 재미는 ‘다름’에 있다. 온천이 많다지만 같은 온천은 하나도 없다. 온천마다 수질도 틀리고 냄새도 다르고 감촉도 같지 않다. 이러니 어디가 딱히 더 좋다고 말할 수가 없다. 온천마다 고유의 이야기를 품고 있고 제각기 여기가 최고라고 한다. 이래서 온천 여행은 재미있다.
이번에 찾아간 온천은 청송 솔샘온천이다. 뒤늦은 명절 친정 인사를 빙자한 부산행에 들른 곳이다. 사실 ㅣ솔샘온천은 오랫동안 나의 버킷리스트 중 하나였다. 하지만 거리가 멀다는 이유로 좀처럼 엄두를 내지 못하던 차였다. 그런데 이번 설 인사 겸 부산까지 차를 몰고 가기로 하면서, 그 길이 멀다고 포항에서 1박을 하고 가자고 했다. 그러다 보니 포항 근처 갈 만한 곳을 찾게 되었고, 마침 솔샘온천이 눈에 들어왔다. 이렇게 좋을 수가! 원체 가고 싶던 곳이기도 했고, 마침 겨울이라 온천이 당기기도 했다. 두 번 생각할 것도 없이 솔샘온천에 들렀다 가기로 했다.
앞서 '온천마다 고유의 이야기가 있다'라고 했지만 솔샘온천에는 유감스럽게도 그런 식으로 전해 내려오는 옛이야기나 전설 같은 것은 없다. 2015년 공사 중 온천공을 발견한 덕에 생긴 '새 온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히려 온천보다는 '청송'이라는 고장에 대해 좀 더 집중하게 된다.
소나무가 얼마나 많으면 고장 이름이 ‘청송(靑松)’, 즉 ‘푸른 소나무’일까? 그러고 보니 온천 이름에도 ‘솔’, ‘소나무’라는 단어가 들어 있다. 짐작대로 청송은 소나무의 고장이다. 청송군 면적의 83%가 임야이고 주된 수종이 소나무라고 한다. 청송은 유명한 게 두 가지 있다. 하나는 주왕산 국립공원이다. 주왕산 국립공원은 솔샘온천에서 멀지 않다. 하지만 주왕산보다 더 유명한 건 사과다. 뭐니뭐니해도 청송은 사과의 고장이다. 서울 어디를 가도 ‘청송 사과’를 파는 트럭을 볼 수 있다. 하지만 아무리 서울에서 먹는 사과가 맛있어도 산지에서 먹는 맛과 비교할 수는 없다. 그러니까 솔샘온천에 간다면 사과도 필수인 셈이다.
솔샘온천은 훌륭했다. 여러모로 합격이었다. 일단 시설이 좋았다. 대명 소노벨 콘도 부설 시설이었는데, 콘도는 겉으로 보기에 좀 낡아 보였지만 온천 시설은 그렇지 않았다. 호텔 뺨치는 시설에 청소 상태도 청결했다. 탕은 넓었고 즐길 수 있는 탕 종류도 많았다. ‘열탕’, ‘온탕’, ‘냉탕’은 기본이고 냉탕과 온탕 사이 ‘미온수탕’까지 있었다. 탕마다 온도계가 달려 있어 물 온도를 보고 골라서 들어갈 수 있었다. 온도계가 있는데도 이따금 직원이 들어와 온도계로 물 온도를 측정하며 혹시 식지 않았는지 다시 점검했다. 관리가 잘 되는 것 같아 마음이 든든했다.
솔샘온천 온천수의 특징은 수량이 풍부하고 약알칼리 성질을 띤다는 거다. 약알칼리라고 하면 어떻게 틀린 건지 이해가 잘 안 갈 수 있는데, 살짝 미끌거린다고 생각하면 된다. 실제 탕에 들어가 보니 때를 밀 수 없을 정도로 미끌거리는 건 아니었지만 몇 번 온탕, 열탕에 들어갔다 나오니 팔을 쓰다듬으면 손이 쑥 미끄러질 정도로 물이 매끄러웠다. 맑은 물이 풍부하게 있으니 마음도 깨끗해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제일 좋았던 건 노천탕이었다. 노천탕이 넓고 탕 종류도 마사지를 받을 수 있는 온탕, 편백나무탕, 편백나무 열탕, 이렇게 세 개나 되었다. 노천탕 주변으로는 대나무 숲을 작게 조성해서 바람이 불 때마다 대나무가 흔들렸다. 마치 숲 한가운데에 있는 것 같았다. 실내 탕과 노천탕은 통창 외벽으로 분리되어 있어 개방감이 대단했다. 안에서도 밖이 훤히 보였다. 천장도 높고 안에서도 노천탕, 대나무, 푸른 하늘까지 볼 수 있으니 가슴이 탁 트였다. 한 가지 더 덧붙이자면 우리가 갔던 때가 특히 좋은 시기였다. 막 명절 연휴가 끝난 참이라 탕에 사람이 없었다. 넓은 탕을 독차지하다시피 하고 좋은 물에 몸을 담그고 있으니 세상 부러울 게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하루종일이라도 온천욕을 즐길 수 있을 것 같았지만 서둘러 포항으로 내려가야 했기에 아쉬운 마음을 안고 온천을 나섰다. 1시간 남짓이었지만 뽀송해진 몸과 마음으로 청송의 명물인 사과를 찾아 나섰다. 사실 찾아 나설 것도 없었다. 솔샘온천 주변, 아니 그뿐만이 아니라 인근 주왕산 국립공원 가는 길 여기저기에 사과를 파는 매장이 널려 있었다. 사과철이 지났다고는 하지만 상자에 가득 담긴 사과를 뵌 마음이 흐뭇했다. 공기조차 살짝 달콤한 것 같았다. 흠과의 경우 싸게 팔았는데 10kg에 6만 원이었다. 따로 깨끗한 녀석들로 포장된 1만 원짜리 상품도 있었다. 종류는 황금 사과, 빨간 사과, 두 종류였고 매장마다 시식용 사과가 있어 사기 전에 맛을 보고 취향껏 고를 수 있었다. 우리는 흠과 10kg 1 상자와 선물용 빨간 사과 1만 원짜리를 사서 나왔다.
청송을 떠나는 길은 아쉬웠다. 하지만 아쉬운 건 좋은 거다. 그곳이 좋았다는 증거다. 그러니까 다시 오고 싶은 기분도 자연히 생긴다. 언젠가 솔샘온천에 다시 와야겠다. 그때는 좀 더 느긋하게 노천탕을 즐겨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