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중국어 학원에 다니고 있다. 다음 달로 예정된 중국 여행을 위해서다. 솔직히 이렇게 잠깐 학원에 다닌다고 크게 도움이 될 리는 없다. 중국어를 십 년 넘게 한 사람도 막상 본토에 가면 본토 발음과 학원 공부가 틀려 하나도 들리지 않는 경우가 부지기수인데, 고작 3개월로는 어림도 없다. 그래도 중국어를 공부한다는 사실 자체가 조금 든든하다. 어쩐지 최소한의 보험을 든 기분이다.
어학 학원은 정말 오랜만이다. 마지막으로 학원에 다녔던 때가 언제였더라? 기억도 가물가물하다. 대학을 졸업반 때였으니까 이삼십 년 전인가 보다. 학원 풍경은 수강료가 엄청 올랐다는 것 외에 그때와 별반 달라진 게 없다. 학생들은 대부분 젊고 어리다. 대학생 혹은 그 또래인 듯하다. 얼굴은 하나같이 진지하다. 유학, 혹은 다른 목적으로 외국어를 배우는 이들의 눈은 반짝거린다. 나도 한때는 이들 중 한 명이었다. 지금은 학원에서 내 또래를 찾기란 하늘의 별 따기다. 아마 최연장자 중 한 명일 거다. 그래도 다행히 지난 두 달 문법반을 수강할 동안에는 나보다 나이가 위인 아저씨 한 분이 더 계셨다. 그래서 외롭지 않았는데 이번 달 회화반으로 옮기고 나서는 이제 명실상부 내가 반에서 나이가 가장 많다.
나이 들어서 공부하려니 힘들다. 공부도 때가 있다고 하는 이유를 알 것 같다. ‘체력이 떨어진다’, ‘머리가 굳었다’는 말이 절로 이해된다. 아무리 외워도 돌아서면 잊어버린다. 단어와 문법은 그냥 머리를 스쳐 지나간다. 문법반에서는 매시간 수업 전에 쪽지 시험이 있었고, 다음 단계로 승급하기 위해서는 진급 시험도 쳐야 했다. 학교 다닐 때 공부 꽤나 했건만 지금은 매번 낙제 직전이었다. 쪽지 시험지를 돌려받으면 수정 흔적이 가득했다. 나중에는 진급 시험에도 떨어지는 게 아닌가 걱정이 될 정도였다. 나도 억울했던 것이 아예 놀았으면 모를까 매번 열심히 복습하는 데도 그랬다. ‘fu si, fu si(복습 復習)!’라고 선생님이 쪽지 시험지 위에 크게 싸 놓은 걸 보면 얼굴이 화끈거렸다. 선생님께 ‘저 복습하는데요’라고 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이었지만 차마 그럴 수는 없었다. 더 열심히 하는 수밖에 없었다.
내가 공부하는 시간은 보통 새벽이다. 수면 시간이 바뀌어 일찍 자고 새벽에 일어나기 때문이다. 공부할 때는 연필로 쓰면서 한다. 요즘 학생들은 어떻게 하는지 모르겠지만 우리 때는 이렇게 쓰면서 공부하는 경우가 많았다. 연습장 앞뒤를 빽빽이 채웠다. 처음에는 연필을 썼다가 나중에는 샤프를 사용했다. 샤프를 쓰기 시작한 때가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초등학교 5학년인가 6학년 언저리였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때 선생님들이 샤프로 쓴 글씨를 좋아하지 않았다. 선생님들은 연필을 쓰라고 하면서 그 이유로 ‘샤프 글씨는 연필로 쓴 거에 비해 힘이 없다’고 했다. 그게 무슨 의미인지 정확히 이해할 순 없었지만 그 때문에 샤프 쓰기가 한동안 꺼려졌던 건 사실이다.
하지만 막상 써 보니 샤프가 연필보다 훨씬 더 편리했다. 연필은 심이 금방 뭉툭해져서 자주 깎아야 했다. 그래서 하루 수업을 듣는 데도 여러 자루 들고 다녀야 했다. 깎아서 짧아지면 쥐는 것도 힘들었다. 그렇게 짧아진 연필을 ‘몽당연필’이라고 불렀다. 그때 우리는 연필이 그 정도로 짧아지면 그냥 버렸는데 그 모습을 보고 선생님들은 혀를 차곤 했다. 요즘 애들은 낭비가 심하다는 거였다. 선생님들이 어렸을 적에도 그 연필 한 자루도 귀해서 짧아지면 볼펜 자루에 끼워 끝까지 사용했다는 했다. 그 소리가 재미있게 들려서 한 번은 정말 연필을 볼펜 자루에 끼우려고 해 본 적이 있었다. 하지만 연필 굵기와 볼펜 자루 구멍 크기가 맞지 않아 연필을 끼울 수가 없었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연필 끝부분 둘레를 깎아내야 했다. 그쯤 되니 그건 절약도 뭣도 아니었다. 더 허탈했던 건 나중에 문방구를 갔더니 연필 확장기라고 따로 팔고 있었다.
그래서 그때는 집집마다 연필깎이가 있었다. 보통 세모꼴이었지만 우리 집 연필깎이는 근사했다. 은색 증기기관차 모양이었는데 번쩍번쩍 빛나는 것이 책상 위에 있으면 위압감마저 풍겼다. 연필을 잡고 손잡이를 돌리면 연필이 매끈해져서 나왔다. 연필깎이는 꼭 진짜 은으로 만들어진 것 같고 연필은 새 연필처럼 보였다. 그렇게 연필깎이는 오랫동안 책상 위를 지켰다. 나중에 학부모가 되어 교실에 갔더니 교실 뒤에 그때 그 열차 모양 연필깎이가 있었다. 반가운 마음도 잠시, 연필깎이는 어린 시절 그 모습이 아니었다. 그때는 그렇게 멋있게 보이던 게 이제는 단지 작고 초라한 플라스틱 도구일 뿐이었다.
연필깎이도 나오기 전,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던 무렵에는 연필이 짧아지면 엄마가 연필을 깎아 주었다. 그때는 연필 깎는 칼도 따로 있었다. 엄마는 솜씨가 좋았다. 엄마가 연필을 사각사각 깎고 나면 연필은 끝이 뾰족하고 길고 늘씬한 모습으로 다시 태어났다. 어쩜 그렇게 솜씨가 좋은지 나중에 연필깎이로 깎은 것 못지않았다. 그런데 내가 깎으면 울퉁불퉁 못난이가 되었다. 아무리 해 봐도 잘되지 않았다. 필통을 열면 내가 깎은 연필이 못난이 인형처럼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다행히 연필깎이가 곧 나와서 더 이상 직접 연필을 깎을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아직도 엄마가 고개를 숙이고 신문지 위에서 연필을 깎던 모습, 엄마가 깎아 준 말끔한 연필이 생각난다.
요즘은 연필을 사용하는 애들이 없는 것 같다. 친구 이야기를 들으니 연필 대신 탭이나 패드 같은 전자 노트와 전자 펜슬을 이용한다고 한다. 이제 연필은커녕 노트도 사라지는 추세인가 보다. 하지만 다행히 노트와 펜이 아직 완전 멸종은 아닌 듯 도서관을 오가며 보게 되는 어린 친구들은 아직 종이와 펜을 사용한다. 조막만 한 손으로 펜을 쥔 모습이 귀엽고 기특하다.
전자 노트와 펜은 편리하겠지만 거기에는 전자펜으로 쓰는 글씨는 연필로 쓰는 글씨와 틀리다. 연필로 글을 쓴다는 건 단지 기록을 남기는 행위 이상이다. 쓰는 사람에 따라 달라지는 필체는 그 사람의 개성이다. 그뿐이 아니다. 연필을 가지고 쓰는 행위 하나하나 역시 의미가 담겨 있다. 글을 쓸 때 연필이 종이를 긁으며 나는 사각거리는 소리, 뾰족하던 심이 점점 뭉툭해지면서 달라지는 선의 굵기, 뭉툭한 연필을 다시 깎아 새 모습으로 만들 때의 쾌감. 이 모든 것이 감각을 자극해서 그 순간을 뇌에 새긴다. 기분이 나쁘면 연필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가고 선은 굵어진다. 기운이 없을 때는 연한 선이 이어진다. 연필이 그려내는 선은 그 순간의 나 자신이다. 그러고 보니 이제야 그때 선생님들이 말씀하시던 ‘연필로 쓰면 글씨에 힘이 있다’는 말이 무슨 말인지 알 것 같다.
종이를 빽빽하게 한 장 정도 채우면 복습이 거진 끝난다. 내 중국어 공부의 끝은 연필을 깎는 거다. 뭉툭해진 연필 끝을 다듬으며 내일의 공부를 기약한다. 여전히 연필 깎는 솜씨는 없지만 이제는 더 이상 내가 깎은 연필이 미워 보이지 않는다. 대신 오랜 친구 마냥 정겹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