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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 엄마는 양반집 아가씨

by 크림동동

"엄마, 쫌!"


나는 나지막이, 하지만 강력하게 엄마한테 말했다.

'후루릅' 하며 빨간 파스타 국물을 들이마시던 엄마는 고개를 들고 반쯤은 짜증스럽고 반쯤은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왜?" 했다.

나는 이를 악물고 최대한 소리 죽여 말했다.

"다음 음식 나오면 바로 포장해서 나가요."

엄마는 여전히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마알라꼬? 여기서 묵으면 돼지."

"아, 나가요. 방에 가서 포장한 음식 가지고 뒹굴면서 먹든 물구나무서서 먹든 일단 여기서 나가요."

나는 다급히 말했다.


조카들은 식당 의자 양쪽에서 한창 난장판을 벌인 참이었고, 식탁 위는 엄마가 덜으려다 엎지른 빨간 파스타 국물로 엉망이었다. 심지어 엄마의 흰 바지까지 빨간 국물이 튄 참이었다. 아빠는 할 수 없다는 부루퉁한 표정으로 맞은편에 앉아 있을 뿐이었다. 이 식구들을 데리고 그 자리에서 식사를 끝낼 때까지 있을 자신이 없었다. 얼른 식당에서 나가야 되겠다는 생각만 들었다. 그런데 이런 판인데도 엄마는 나가자는 내 말이 이해가 안 되는 모양이었다.

'하아~' 나는 다음 말을 하기 전에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내 눈앞, 이 난장판 한가운데에 앉아 계시는 분은 우리 엄마, 다른 사람 눈에는 식당 안에서까지 선캡을 쓰고 있는 주책맞고 목소리 큰 할머니, 하지만 원래 정체는 양반집 아가씨다. 나부터 잘 믿기지는 않지만.






울 엄마는 김해 허 씨다. 외할아버지는 김해 능참봉, 천석꾼의 막내아들이었다. 외할머니는 여강 이 씨로 조선 시대 유학자, 회재 이언적을 배출한 뿌리 깊은 양반 가문 출신이었다. 엄마의 어린 시절은 유복했다. 남들은 구경도 못한 유치원을 2년이나 다녔다. 그것만으로도 부족했는지 외할머니는 손수 원피스를 곱게 지어 유치원에 가는 딸한테 입히기까지 했다. 하지만 엄마는 그 원피스를 입는 게 하나도 좋지 않았다고 한다. 외할머니가 얼마나 엄격하셨던지 옷에 얼룩 하나라도 묻으면 불호령이 떨어졌다는 거다. 그래서 어린 엄마는 그 원피스를 입을 때면 옷을 더럽히지 않기 위해 양손을 귀신처럼 앞으로 늘어뜨리고 다녔다고 했다.



2.jpg 양동 마을


그 외할머니는 엄마 일곱 살 때 갑자기 돌아가셨다. 그렇지만 엄마는 외할머니의 성격과 살림 솜씨를 아직도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 둘째가라면 서러울 바느질 솜씨와 음식 솜씨, 자식에 대한 교육 열정, 엄격한 양육 태도 등. 그런데 엄마의 외할머니에 대한 기억은 온통 혼난 것과 예의범절에 대한 훈육뿐이었다. 자애와 사랑 같은 건 없었다. 그래서 외할머니가 갑자기 돌아가셨을 때도 엄마가 느낀 첫 번째 감정은 슬픔보다는 해방감이었다고 한다.

'아, 이제 더 이상 야단치는 무서운 사람이 없구나.'

엄마가 외할머니의 부고를 듣고 처음으로 떠오른 생각이라고 한다.


외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엄마는 일곱 살, 두 외삼촌은 각각 열 살, 네 살, 그리고 이모는 한 살이었다. 외할아버지는 아직 아기였던 이모는 한동안 외가로 보냈다. 외할아버지는 그 후 결혼을 두 번이나 더 하셨지만 더 이상 자식은 없었다. 외할아버지는 어린 나이에 엄마를 잃은 큰딸이 불쌍했던지 엄마의 응석을 다 받아 주었다. 그 결과 엄마는 남매 서열로는 둘째, 딸들 중에서는 언니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외동딸인 양 버릇없이 자랐다.







나는 어릴 때 궁금했다. 엄마는 ‘외할머니’와 데면데면했고 일이 있으면 항상 외할아버지만 찾았다. 어린 시절 이야기를 그다지 하지도 않았다. 어쩌다 한다 해도 그 속에 외할머니가 나오는 법이 없었다. 그리고 가장 이상했던 건, 분명히 외할머니가 있는데 ‘외할머니 제사’가 있다는 거였다. ‘저 외할머니는 누구지?’라며 궁금해했던 기억이 난다. 내가 ‘친 외할머니’의 존재를 알게 된 건 아주 나중이었다. '친 외할머니'의 존재를 알고 나서 나는 엄마를 보면 가끔 궁금해진다. ‘외할머니가 계속 살아 계셨다면 지금 엄마는 어떤 모습일까?’


엄마가 외할머니 이야기를 하게 된 건 요 몇 년 사이 일이다. 레퍼토리는 항상 비슷하다. 외할머니 가문이 얼마나 대단한지, 그런 대 양반 가문에서 자란 외할머니는 얼마나 완벽하고 꼼꼼한 분이셨는지, 그래서 엄마가 얼마나 외할머니가 무서워했는지. 그러고 나면 엄마는 나한테 가끔 ‘너가 가만히 보면 외할머니를 닮았다’고 했다. 그럴 때면 기분이 묘했다. 이건 나에 대한 애정을 표현하는 걸까, 아니면 그만큼 내가 멀고 거북하게 느껴진다는 걸까?


한 번은 참지 못하고 대들 듯이 물었다. “엄마는 항상 외할머니에 대해 안 좋은 기억만 이야기하면서, 내가 외할머니를 닮았다니, 내가 그렇게 싫은 거예요?” 엄마는 당황한 듯했다. 당신이 하는 이야기가 상대편에게 어떻게 들릴지 전혀 생각해 보지 않은 눈치였다.


생각해 보면 이상하다. 엄마는 평생 외할아버지를 의지했지만, 엄마의 추억담 속에는 의외로 외할아버지가 등장하지 않는다. 언제나 무서웠다던 외할머니 이야기만 반복해서 나온다. 그래서 요즘은 엄마가 그렇게 안 하던 어린 시절 이야기를 계속하는 것 자체가 외할머니에 대한 그리움의 표현이 아닌가 싶다. 좋았던 어린 시절, 자식을 면밀하게 살피고 훈육하는 눈길이 있던 시절. 따지고 보면 엄마가 양반집 아가씨로 있을 수 있었던 시간은 곧 외할머니와 함께 했던 시간이었다. 엄마의 그 시절 회고담은 결국 외할머니에 대한 사모곡인 게 아닐까?


엄마와 나는 정말 맞지 않지만 세월이 갈수록 핏줄이 연결해 주는 힘을 느끼게 된다. 젊은 시절, 그렇게 기세등등하고 화려했던 엄마가 어느새 수그러들어 시골 할머니인 양 주책맞은 모습이 된 걸 보면 창피하면서도 서글프다. 엄마를 향한 짜증, 애련한 마음, 이런 조각들이 모여 결국 그리움이 되는 거겠지. 나도 나중에 엄마가 없는 언젠가 문득 엄마에 대한 사무치는 사랑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4.jpg 엄마와 아빠. 국립중앙박물관 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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