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통해서만 연락해요
압구정으로 오면서 여러 사람들을 만났다. 어떤 인연은 힘든 기억으로, 어떤 인연은 좋은 기억으로 남았다. 이번과 다음 편에서는 압구정에서 만난 사람들 이야기를 해 보려 한다.
그 공인중개사는 우리가 압구정에서 가장 먼저 만난 사람이었다. 그녀는 단발의 중년 여성이었는데 이 동네에서 수많은 거래를 하며 닳고 닳은 듯한 인물이었다. ‘강남 중에서도 강남’인 압구정에서의 부동산 판에 대해 전혀 모르던 우리는 이 공인중개사의 말에 전적으로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따지고 보면 우리가 압구정 아파트를 사게 된 데에는 그녀의 말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여기 아파트는 사고 싶다고 살 수 있는 게 아니다,’ ‘집주인이 계좌 번호를 줘야만 살 수 있다’ 등과 같은 그녀의 심리적 압박에 결국 넘어가 매수를 단행했던 거다. 그렇다고 그 공인중개사가 사기꾼이었다는 말은 아니다. 그녀는 ‘매수자와 매도자를 중개’한다는 중개사 본연의 업무에 충실하긴 했다. 수수료를 터무니없게 요구하지도 않았다. 나중에 내가 “그동안 너무 수고하셨어요. 제가 커피라도 한잔 살게요.” 하자, “에이~, 사모님, 커피 정도 가지고는 안 되죠.”라고 하긴 했지만.
공인중개사에게 인간적인 면을 기대한다는 사실 자체가 우스운 일일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가 운이 좋았던 건지 지금껏 여러 번 집을 옮겨 다니며 만난 중개사들은 나름 진솔한 구석이 있었다. 한 중개사는 동네 할머니처럼 어딘지 서툴면서도 소박했고, 또 어떤 중개사는 마치 동네 언니처럼 유쾌하게 인사하며 가끔 차 한잔하러 들르라고 했다. 그중 최고봉은 이사 첫날 새 집에 환영의 선물로 휴지 한 롤과 쪽지를 남겨 두었던 중개사였다. 쪽지에는 새 집에서 행복하게 잘 지내시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우리가 감동받았음은 물론이다. 압구정에 집을 알아보면서 우리는 그 정도까지는 아니어도 지금과 비슷한 ‘평범한’ 공인중개사를 만날 걸로 기대했다. 하지만 우리가 압구정에서 만난 ‘그녀’는 틀렸다. 틀려도 너무 틀렸다.
그녀는 프로페셔널해 보이면서도 정작 세부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구멍이 많았고, 단호한 말투로 시작했지만 이야기가 길어지면 말이 흐려졌다. 처음에 ‘과연 압구정은 틀리는구나’하고 기대했던 우리가 점차 고개를 갸우뚱할 때 즈음, 무슨 일로 내가 매도자의 연락처를 물어본 일이 있었다. 그녀는 펄쩍 뛰며 “그런 걸 왜 물어요? 절대 상대방에게 직접 연락하거나 하면 안 돼. 무조건 우리를 통해야 돼요. 궁금한 게 있으면 우리한테 물어봐.” 했다. ‘이 바닥에서 몇십 년을 거래하며 별의별 사람을 다 보고, 별의별 경우를 다 봤기 때문에 문제 될 만한 일은 아예 만들지 않기 위해서’라는 그녀의 설명에 그런 태도가 어느 정도 이해될 만은 했지만 문제는 매사 그런 식으로 어딘지 모르게 우리를 무시하는 듯한 태도였다. 그녀의 말투는 묘하게 기분 나빴고, 이야기를 하고 있으면 우리가 영끌을 해서 압구정에 간신히 입성한 신세라는 걸 계속 자각하게 되었다.
‘도도하고 삭막한 인간미 없는 곳, 그리고 우리 수준보다 높은 곳.’
압구정에 대한 우리의 주눅 든 첫인상은 그 중개사에게서부터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