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납량특집'과 '공포영화 특집'을 기억하시나요
어제, 오늘 낮 최고 기온이 36도라고 한다. 태어나서 이렇게 더운 건 처음이다. 특히나 우리 집은 할아버지 아파트에 최고층이라 위에서 내려쬐는 태양열을 그대로 받는다. 게다가 동향이다. 아침나절에는 집 안은 가마솥이나 다름없다. 그래서 오늘 아침 식사가 끝나자마자 남편과 나는 팝콘처럼 집 밖으로 튀어나왔다. 그렇게 도서관으로 피서를 와서 이 글을 쓰고 있다. 원래는 다른 글을 쓰려고 했지만, 더위 탓인지 머리가 흐리다. 자꾸 물 생각만 나서 내친김에 컴퓨터 배경 화면도 폭포 화면으로 바꿨다. 그랬더니 기분이 좀 났다. 그 김에 더위와 관련한 추억이나 좀 풀어볼까 한다.
요즘은 이렇게 이야기를 시작하면 ‘꼰대 인증’이라고 하던데, 그래도 다른 더 좋은 표현이 생각이 안 나니 그냥 써 본다. ‘라떼는’, 그러니까 ‘내가 어릴 때는’ 여름은 '납량 특집', '괴담', '공포특집'의 계절이었다. 어릴 때 보던 ‘소년중앙’이나 ‘어깨동무’, ‘새소년’ 같은 잡지에서는 여름만 되면 ‘납량 특집’을 실었다. 나는 겁이 많으면서도 무서운 걸 즐기는 성격이라 항상 조마조마하며 여름 납량 특집을 빠뜨리지 않고 챙겨 읽었다. 그러고 나면 몇 날 며칠은 무서워서 끙끙대곤 했다. 저주를 불러오는 인형이라든가, 엘리베이터를 잘못 내렸는데, 알고 보니 그 층은 그 아파트에는 없는 ‘4층’이었다는 둥, 지금 들으면 유치할 것 같은 이야기가 그때는 왜 그렇게 무서웠는지 모르겠다. 그런데 몇 년을 계속 보다 보니 결국 나조차도 매년 비슷한 이야기가 실린다는 걸 알게 되었다. 어딘지 맥이 빠졌지만, 그래도 여름의 괴담 특집에서 손을 놓을 순 없었다. 그러다가 ‘소년중앙’이나 ‘어깨동무’가 아니라 ‘하이틴’을 보는 나이가 되었다. ‘하이틴’에는 여름이 되어도 납량 특집 같은 건 올라오지 않았다. 그리고 ‘소년중앙’과 ‘어깨동무’도 슬그머니 사라져 버렸다. 괜스레 서운했다.
여름은 납량 특집뿐만이 아니라 공포 영화의 계절이었다. 요즘 여름 극장가는 시원한 액션물이나 블록버스터가 대세이지만 그때는 ‘여름’ 하면 공포 영화였다. 극장까지 가서 공포 영화를 본 기억은 별로 없지만 TV 영화로는 정말 많이 봤다. 당시 3대 안방극장으로 MBC의 ‘주말의 명화’, KBS 2의 ‘토요명화’, KBS 1의 ‘명화극장’이 있었다. 특히 일요일 밤에 하는 ‘명화극장’은 지금은 작고한 영화 평론가 정영일 씨의 영화 소개가 곁들여져 다른 영화 프로그램에 비해 좀 더 ‘격’이 느껴졌다. 명화극장 역시 여름이 되면 공포 영화 특집을 했는데, 그중 기억에 남는 건 ‘어셔 가의 몰락’과 ‘심야의 미술관’이다. ‘어셔 가의 몰락’은 정영일 씨의 영화 소개를 듣고 몹시 기대했으나 결국 보지 못했다. 명화극장이 일요일 밤 10시에 했기 때문에, 아마도 엄마가 다음 날 학교에 가야 하니 어서 가서 자라고 방으로 쫓았던 듯하다. 하지만 엄마는 영화를 본 듯 다음 날 아침, 아빠한테 “어제 혼자 ‘어셔 가의 몰락’을 보는데, 정말 무섭더라” 하고 말씀하셨다. 당시에는 유튜브도 없어서 한번 놓친 영화는 다시 볼 길이 없었다. 몇 년 전 그때 그 ‘어셔 가의 몰락’을 찾아봤지만, 같은 제목의 영화가 여러 편 있어 어떤 영화가 내 기억 속의 그 영화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어셔 가의 몰락’은 영영 내가 놓친 영화로 남게 되었다.
‘심야의 미술관’은 직접 보긴 했다. 이 영화는 제목처럼 세 편의 그림에 얽힌 이야기를 소개하는 액자 구조의 영화였다. 첫 번째는 그림이 변하는 이야기, 두 번째는 돈은 많지만 장님인 여자가 남의 눈을 이식받으면서 일어나는 이야기, 세 번째는 미술관에 매일 가서 고요한 호수에서 낚시를 하는 낚시꾼의 그림을 보는 정체를 숨기고 사는 나치 전범의 이야기였다. 나는 세 편의 이야기 중 무슨 이유에선가 첫 번째 에피소드는 놓치고 두 번째와 세 번째 에피소드만 봤었다. 그래서 이 영화를 본 친구들은 첫 번째 이야기, 그림이 변하는 이야기가 제일 무서웠다고 했던 반면, 나는 마지막 세 번째, 그림 속에 갇히는 사나이의 이야기가 가장 무서웠다. 피 한 방울 튀지 않고 귀신이나 유령이 전혀 나오지 않는데도 심장을 조여 오는 공포가 굉장히 강렬했던 것 같다.
그때는 어린이 잡지의 괴담을 읽고 티비에서 공포 영화 특집을 보고 나면 어느새 여름 방학이 끝나고 그럭저럭 여름이 지나갔던 것 같다. 지금은 여름이 길어도 너무 길다. 공포 영화 몇 편을 봐도 끝날 기미가 없다. 요즘은 유튜브와 OTT가 대세라서 여름이라고 딱히 공포 영화 특집이 있지도 않다. 그 시절 그 귀신들은 다 어디 갔을까? 아마 숨 막히는 이번 여름 습기에 질려 어딘가 숨어 버렸나 보다. 오늘 밤은 선선한 바람 속에서 공포 영화라도 한편 보며 어린 시절과 같은 여름밤의 정취를 느낄 수 있으면 좋으련만, 오후 6시가 다 되었는데도 아직 35도인 걸 보니 그건 불가능한 바람인 듯하다. 그나저나 정말 덥다. 덥고도 길다, 이번 여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