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식되어 가네, 나도 모르는 사이.
숙소도 예약하지 않고 무작정 강릉으로 떠났다. 더워지기 전에 바다를 보고 싶었다. KTX는 잘 달렸다. 강릉에 도착하자마자 제일 먼저 보이는 게스트하우스에 들어갔다. 카운터에 있는 사람에게 물었다. "제일 싼 방이 얼마예요? 오늘만 잘 건데."
방에 짐을 풀고 한숨 돌렸다. 잠시 후 숙소 내부를 둘러보다가 먼지 풀풀 날리는 책장을 발견했다. 눈에 띄는 게 있었다. 두산세계대백과사전, 1990년 판. 이땐 백과사전이 종이책이었구나. 인터넷은 있었을까? 이걸 만든 사람들은 자기들이 세상 지식을 어느 정도나 커버했다고 생각했을까? 색 바랜 책장을 넘기며 작은 글씨로 촘촘히 새겨진 항목들을 훑었다.
예전에 어떤 어른이 말했다. 자기네가 젊어서 싸워 쟁취한 새로운 영토를 요즘 아이들은 너무나 자연스레 밟으며 자란다고. 새로운 세계를 그냥 자연스레 살아버린다고. 원래 으레 그런 것처럼. 그녀의 말은 반은 쓸쓸함 반은 자부심이었다. 미래를 전취하기 위해 투쟁으로 청춘을 사르며 보낸 세월, 그 끝에 남은 한 줌 재로서의 나.
1990년에 출판된 종이 백과사전을 소장할 이유가 있을까? 그 안에 든 정보는 낡고 한정적이라서 책장을 할애하기엔 부담스러울 테다. 나도 그 해에 태어났다. 10대 때, 평생 학도로 살며 부단히 나를 갱신해서 언제나 생생한 영혼을 유지할 거라고 굳게 다짐했다. 젊은 혈기에. 요즘은 조금씩 풍화되는 나를 느끼며 그게 순리라는 걸 곱씹는다. 가슴에 쓸쓸함이 스민다.
대학시절, 우리는 우리가 한국 사회의 윤리적 첨단에 있다고 믿었다. 민중가요를 배우고 구호를 외치던 동료들. 겉돌면서도 그 근처를 벗어나지 못했던 나. 대단한 걸 꿈꾸지 않았다. 그저 조그만 이론적 진전이나마 이룸으로써 사회 개선에 작은 도움이라도 되기를 바랐다. 이룬 것 없이 서른을 맞으면서 조급해졌다. ‘조금만 더 있으면 나는 경제 사정상 공부를 못 해. 그전에 뭔가 이뤄내야 해.’ 그렇게 청춘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고 있었다.
모래사장을 걸었다. 파도… 파도… 파도……. 밀려왔다 다시 돌아가고 또 쭉 밀려왔다가 다시 쓱 쓸려가는. 저 바다는 언제부터 여기에 파도로 왔다가 돌아가기를 반복했을까. 어쩌면 우리의 청춘도 한때의 뜨거운 불꽃으로 타올랐다 꺼지는, 왔다가도 다시 돌아가는 파도와 같은 것은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