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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예지 Jul 25. 2019

최악의 날, 프로포즈를 받다

그 날을 떠올리면 눈물부터 나요

프로포즈를 얘기하면 남편에겐 미안한 맘뿐이다. 그는 내 성에 차는 프로포즈를 위해 혼자 직접 발로 뛰었다. 추운 겨울이었음에도 송골송골 맺혀있는 그의 땀으로 확인할 수 없었던 프로포즈 준비 과정을 여실히 상상할 수 있었다.


그에게 받은 프로포즈를 얘기하기 전에, 프로포즈란 뭘까? 여성에게 프로포즈란 ‘삶의 최고의 로망을 실현하는 일생일대의 사건’이다. 동창이 함께 모여 얘기할 때마다 각자 꿈꾸는 프로포즈를 얘기할 때마다, 모두가 함께 그 날로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당연하다시피 난 프로포즈를 받아야 하는 대상이며 상대방인 남자 친구에게 프로포즈를 요구하는 게 당연한 권리라고 생각하며 살아왔다.


이십 대 초반 내가 상상하던 프로포즈와 지금은 너무나도 달랐다. 결혼을 ‘해달라’ ‘하자’ 권유하는 의미에서 프로포즈를 하는 줄 알았건만, 그게 아니었다. 결혼하자고 약속하고 상견례를 다 끝낸 후에야 진짜 <프로포즈>의 시기가 도래하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꿈꾸던 프로포즈


부쩍 활동적인 데다가 관심받는 걸 좋아했던 이십 대 초반 시절에 프로포즈 키워드는 ‘주목’이었다. 사람들이 발 디딜 틈 없이 북적북적한 곳이 내가 원하던 스팟이었다. 나를 위한 밴드가 무대에서 연주하는 프로포즈를 꿈꿨다. 내 이름을 불러주는 관객들의 모습을 상상했다. 실용음악과를 다니던 남편 덕에 무대의 그 폭발할 것 같은 열기와 뜨거운 온도를 온몸으로 체감하는 그를 자랑스럽게 바라봤기 때문이다.


멋진 그의 모습을 모두에게 자랑하고 싶었다. 확실히.


"난 자기가 공연장에서 프로포즈해 줬으면 좋겠어.

"그래야겠다. 세션 누구랑 할까?


이런 말을 하면서도 그와의 관계를 확신할 수 없었다. 연애 5년 차이자 대학 생활 중반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만나기만 하면 으르렁대며 서로를 어떻게 더 많이 상처 줄 수 있을지 고민하며 아슬아슬하게 썩은 동아줄을 잡고 있었다. 누구 하나가 놓아버리면 끊어질 줄인데 그 와중에도 프러포즈를 말하고 있었다.


이별을 다짐한 어느 날, 동영상 하나를 보고 펑펑 눈물을 흘렸다. 헤어짐을 생각하던 그날도 추천 영상을 보고 있었다. 트렁크 뒷자리에 앉은 금발머리 그녀는 노래를 들으며 꽃 한 송이씩을 건네받았다. 그녀의 제일 친한 친구나 사랑하는 가족들의 축하인사를 받는 그녀가 이 세상에 모든 걸 다 가진 것만 같았다.


처음엔 화가 났다. 나 빼고 온 세상이 웃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가혹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도 얼마 지나지 않아 행복한 그녀의 얼굴을 보는 나도 덩달아 행복해졌다. 아무리 이기적 존재라고 하더라도 천성으로 인해 인간인 나는 타인의 운명에 관심을 가지게 되고, 단지 그것을 바라보는 즐거움밖엔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고 하더라도 타인의 행복를 필요로 한다. (애덤 스미스 ‘도덕감정론’)


그래, 아마도 최악의 날이었다


프로포즈를 받기에 적당한 날은 아니었다고 짐작한다. 아침 댓바람부터 컨디션이 좋지 않았다. 투샷의 뜨거운 커피를 손으로 감싸 쥐고 뜨겁게 오늘 하루를 버텨보리라 다짐했다. 그런데. 다짐은 무너지라고 있나 보다.


아침부터 사내 교육이 있다고 1층 카페로 모였더랬다. 계열사였던 우리 회사 역시 새로운 시스템을 적용시켜야 한단다. 그래서 나는 팀 막내로 자진해서 시스템을 배우겠다고 했다. 녹음도 하고 제대로 정리해 팀원들한테 오랜만에 ‘할 일’했다는 인정을 받고 싶었다. 내 계획은 또 물거품이 돼버렸다.


매일 아침마다 클라이언트에게 모니터링을 보내는 게 주 업무인 난, 모니터링의 링크가 잘못 들어가 있는 것도 모르고 그냥 전송을 눌렀다. 두 번째 수정하면서도 실수 연발이었다. 내 실수로 너무 화가 나있고 속 상해 있던 상태에서 팀원들은 나를 나무라기 시작했다.


“아 쪽팔려서 못살겠네. 적당히 좀 해요. 좋은 일 앞두고 내가 웬만하면 좋게 좋게 넘어가고 있다는 거. 알아채고 정신 좀 차려요.


이때부터 머리는 새하얘지고 강사님의 단어들은 한 귀로 들어와서 나머지 귀로 스르륵 떠나버린다. 그렇게 나라는 인간은 쓸모없는 무엇이었다. 끝나지 않은 강의를 뒤로하고 자리에 앉아있다 화장실에 가 울적한 맘으로 전화를 한다. 결혼 때문에 정신없어서 이렇게 사소한 실수를 해버린 나를 탓하고 또 탓하다가 메신저를 보며 또 무너져버렸다.


바보 같은 난 아무것도 몰랐어


하필이면 그 감정상태를 가지고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청첩장을 주기로 약속한 날이었다. 1년 만에 만난 그들에게 내 힘듦을 오롯이 보여줄 순 없었다. 강남역에서 만난 그들과 두 시간 정도의 수다 끝에 두 시간에 걸려 광역버스를 타고 집을 향한다.


버스 안에 한 자리는 온전히 나를 위한 공간이었다. 눈을 꼭 감고 하루를 돌아본다. 불쑥불쑥 메신저의 말이 떠올라 울컥한 마음을 억누르느라 평화로운 맘이 다시 바빠졌다. 서러움을 토로할 곳은 남편밖에 없었다. 커플 메신저로 몇 차례 연락을 해보지만 남편의 대답은 시큰둥했다.


“조심히 와~ 나 피곤해서 먼저 잘게.

“뭐야. 나랑 연락 좀 하자.

“잘 테니까 빨리 와!


그가 잠들기 전에 가서 안기고 싶었다. 버스에서 내려서 경보하듯 도보를 걷고 횡단보도를 날아간다. 내린 지 5분쯤 되어 비밀번호를 황급히 누르고 열리지도 않았는데 문을 당긴다. 깜깜한 집 안으로 꽃잎이 깔려있고 양쪽으로 하나하나 촛불이 보인다. 반대편에 웃는 얼굴로 그가 서 있다.


문을 열자마자 눈물이 팡하고 쏟아졌다. 핏기 없이 메마른 얼굴이 집에 들어서자마자 생기를 찾기 시작했다. 이제야 찬찬히 그의 단어들을 조합해본다. 몇 주 전부터 오랜만에 호텔에 가자고 보채던 그에게 눈치 빵점인 예비 신부는 ‘프로포즈하게? 괜찮아’라며 그의 말을 끊어냈다. 그다음으론 자꾸 어딘가로 나를 유도하려던 그에게 ‘피곤하다’며 결혼한 이후로 날을 미뤘던 나였다.


우리집이 이렇게 예뻤나?


이렇게 하다간 프로포즈도 할 수 없겠다 생각했던 그는 결국 그녀의 최악의 날에 모든 에너지를 쏟겠다 생각했다. 내일 새벽 세시에 일어나 출근 준비를 하더라도 어쩔 수 없었다. 결혼 때문에 불행해질 그녀를 용납할 자신이 없었다. 다음주로 계획한 그의 일정은 그녀의 눈물로 인해 불가피하게 틀어졌다.


그렇게나 많은 관중들 앞에서 프로포즈를 받음으로써 특별한 날이 되길 소망했다. 아주 평범한 일상의 날이었지만 그는 오히려 그 날의 기억을 변신시켜줬다. 아주 지독히도 최악의 날일 수 있었던 기억을 오롯이 도려 내주던 그의 현명한 '프로포즈' 방법은 강력하게 추천하고 말고.


나의 행복과 불행을 관장하는 사람은 분명 나여야 했다. 외부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이리저리 휩쓸리는 나에게 버틸 여유분의 힘이 없었다. 그렇게 맥없이 쓰러질 시기가 도래했을 때 그는 아무렇지 않게 매듭 지어준다. 결국 최악의 날은 이렇게 그의 마법으로 스르르 풀려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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