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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예지 Nov 05. 2019

또 한 사람의 숨결이 바람이 될 때

울고 또 울어도 슬픔이 사라지지 않을 때

횡단보도를 건너 버스가 내 곁을 지나가기 전에 빠른 경보를 해야 한다. 그래야만 버스를 놓치지 않고 탈 수 있다. 앞만 보고 달리다 눈 앞에 장애물로 인해 바닥에 발이 묶였다. 한참을 가만히 서 있다 스르르 발목에 있던 끈이 풀린다. 주말 기도를 나가지 않던 난 그 순간 성호경을 긋는다.


흰 천으로 온몸을 덮은 누군가가 내 앞을 지나가고, 그 뒤로 목을 뒤로 젖힌 여인의 한 맺힌 몸짓이 보였다. 이어폰을 꽂고 있는 나의 귀 속으로 가슴을 찢는 그녀의 절규가 뒤섞인다.


당신은 안녕하십니까


이번에만 몇 번째인지 모르겠다. 장례식장을 앞을 걸어가면서 이생을 지나 저 생으로 떠나가는 세 번째 영혼을 만났다. 성도 모르고 이름도 불러본 적 없는 나에게는 무명의 사람일 뿐인데도 그들은 날 울컥하게 만든다. 감성적인 사람이라서가 아니다. 결국 죽음은 모두 떠나보낼 수 있는 이들이며 그들을 놓아주어야 한다는 또 다른 자연의 섭리를 큰 충격과 함께 던져놓기 때문이다.


시간이 주어진다면 그녀와 목 놓아 울고 싶었다. 하지만 내 가방 안에는 오늘 수업할 수업 계획서와 노트북이 있다. 첫 수업을 앞둔 선생님으로 감정의 동요를 아이들에게 보여줄 순 없다. 오랜만에 가면을 쓰고 긍정의 페르소나를 보여줘야 한다.


바람에 흔들리는 촛불처럼 나 역시도 그렇게 유약한 인간이었다.

우린 그 주위의 환경과 삶의 터전에 따라 흔들리는 유약한 존재다. 수업 시간에는 님비 현상 같은 지역 이기주의는 배척해야 할 나쁜 행위라고 말했지만, 정작 내 집 가까운 곳에 장례식장이 있다는 건 받아들이기 어려운 사실이었다. 세상에서 없어서는 안 될 사랑하는 사람의 숨결과 눈빛을 볼 수 없다는 좌절로 그들은 중력을 이겨내지 못하고 연신 무릎을 구부린다.


왜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일까?


우리가 죽음의 순간을 본 경험은 전무후무하다. 드라마에 나오는 모든 것들은 그저 상상력에 기반한 픽션일 뿐이다. 칸트에 의하면 개인의 죽음은 매우 선험적*인 것이다. 그렇게 내가 아닌 사랑하는 이에 의해 그려진 죽음의 이미지는 가까이하지 말아야 할 제일 무서운 경험이다.


"남아있는 엄마 아빠가 걱정돼요. 그게 무서워요.

"그건 남아 있는 사람들의 몫이야.


죽어야 하는 어린아이는 가야 할 길을 가지 못하고 있었다. 그 어린아이의 부모는 아이의 생명이 다 한 것을 알고 자신의 생명줄을 끊어 아이에게 주고, 그것도 모자라서 다른 사람의 생명줄을 찾아 큰 값을 주고 아이의 손목까지 생명줄을 연결하고 있었다. 그들의 간절한 마음 때문이었을까? 병실에 누워 아이는 부모들에게 죽지 못해 생명을 유지한 채 웃음을 지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미 알고 있다. 자신이 죽어야 한다는 사실을.


아들에게 온 생명선을 잘라주느라 본인은 머리가 하얗게 새어도 얼굴을 만질 수 있다면, 좋단다 부모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신을 따라가지 않았던 이유 단 하나. 나 없이 살아나갈 부모의 아픔과 두려움이 그에게 명료하게 그려졌기 때문이다. 아이의 예상대로 죽음을 선택한 아이의 침대 앞에서 울부짖으며 형용할 수 없는 괴로움을 드러내는 부모의 등은 너무 애처로웠다. 창 너머에서 하늘로 떠나지 못하는 아이의 뒷모습도 마찬가지였다.


<도깨비> 이후 한 편의 드라마를 세 번 이상 본 건, <호텔 델루나>가 처음이다. 저승에 가기 전 이생에서 처리할 무언가가 남아 있다거나, 한이 있으면 머무를 수 있다는 호텔. 주인공 '만월'이는 천 년을 넘게 감정이 메마른 상태로 살아왔다. 그녀의 마음을 뜻하는 월계수는 그녀가 호텔 사장일 동안 한 번도 이파리도 꽃잎도 핀 적이 없지만, 밀당의 고수이자 그녀의 모든 감정을 '찬성' 하는 그 남자 덕에 꽃도 만월 했다.


꽃이 피면 왜 져야 하냐는 물음에도 당연히 꽃은 지기 위해 핀다는 드라마 속의 대사로 여름이 지나 가을이 오는 때 엄마와 공원을 걸으며 했던 말이 떠오른다. 나보다 더 예민함의 촉수가 발달한 엄마는 꽃이 피고 질 때마다 그리고 잎의 색깔이 변하고 앙상한 나무가 그녀의 모습인 듯 이리저리 휘청였다.


하고 싶은 말을 차마 하지 못했어


예측 불가능한 상황에서 질병이 찾아온다. 그리고 어느 순간 죽음이 목전에 도달했다. 질병은 그래도 서서히 내게 다가오지만 때때로 질병 아닌 자연재해 같은 갑작스러운 죽음은 우리를 당황스럽게 한다. 이십 대 후반을 달려가는 우리에게 아주 가끔 들려오는 친구의 부고는 어마어마한 충격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다. 잠을 자다 심장마비로 생을 달리 한 친구가 있어 장례식에 다녀온 남편은 며칠간 과로하는 내게 그렇게 잔소리를 해댄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빗겨 나 있는게 부러웠던 건 딱 한 가지다. 저승으로 가기 전에 사랑하는 사람과 손을 잡고 대화할 시간이 주어진다는 것. 내가 너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애처롭게 생각하는지, 그리고 함께 했던 우리의 삶이 얼마나 찬란했는지 눈을 보며 나눈다. 떠나가는 사람 말고 남아 있는 사람에게 함께라는 의미가 퇴색되는 순간, 그 불확실한 미래를 어떻게 버틸 수 있을지가 우리는 두려운 것이기 때문이다. 


어릴 적 죽음은 너무나도 낯선 것이었다. 죽음이 눈 앞으로 그렇게 크고 검은 무엇으로 다가 온 건 아홉 살 인생을 살았을 때다. 엄마의 아빠(외할아버지)가 하늘나라로 돌아간 그 날, 축축하고 습한 처마 밑에서 엄마와 그녀의 엄마인 나의 외할머니는 마을이 떠나가라 울고 있었다. 주방 구석에 웅크려 앉은 나와 사촌들은 그들의 울부짖음이 끝나갈 때까지 천장 위에서 뛰어다니는 쥐가 떨어지지 않을까 하는 등꼴 오싹한 다른 두려움을 겪고 있었다. 사랑하는 나의 엄마가 아픈 게 싫었고, 그 공간에서 있는 우리가 또 불쌍했다. 


오랜 시간이 지나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회고하는 이들은 하지 못한 말을 후회한다. <숨결이 바람이 될 때>의 저자 폴 칼라니티는 자신의 얼마 남지 않은 죽음을 준비하며, 남겨질 사람들에게 못다 한 말을 전하기 위해 글을 쓰기 시작한다.


"이 아이에게 내가 해 줄 수 있는 말은 단 하나뿐이다. 그 메시지는 간단하다. 네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무슨 일을 했는지, 세상에 어떤 의미 있는 일을 했는지 설명해야 하는 순간이 온다면, 바라건대 내가 죽어가는 아빠의 나날을 충만한 기쁨으로 채워줬음을 빼놓지 말았으면 좋겠구나. 아빠가 평생 느껴보지 못한 기쁨이었고, 그로 인해 아빠는 이제 더 많은 것을 바라지 않고 만족하며 편히 쉴 수 있게 되었단다. 지금 이 순간, 그건 내게 정말로 엄청난 일이란다."


슬펐다, 아름다웠다, 남겨질 사람을 위해 그가 남겨놓은 글이.


혼자 충분히 무게를 감당하기에도 벅찼을 그는 남겨질 사랑하는 이들에게 큰 선물을 준다. 삶의 마지막 몇 해 동안 그는 지나가는 시곗바늘에 자극받으며 쉼 없이 글을 썼단다. 그 덕분에 남겨진 그의 아내는 미완성된 그의 작품을 마지막으로 마무리하기에 이른다.


"나는 폴이 세상을 떠나면 내 인생에는 오로지 공허와 슬픔만 남을 줄 알았다. 누군가가 세상을 떠난 뒤에도 똑같이 그 사람을 사랑할 수 있을 거라고는, 또 끔찍한 슬픔과 비통함의 무게를 못 이겨 때로 몸을 떨며 한탄하면서도 여전히 큰 사랑과 감사를 계속 느낄 수 있을 거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폴은 세상을 떠났고, 나는 거의 매 순간 그가 사무치게 그립지만, 우리가 여전히 함께 만든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느낌을 받는다."


누구에게나 자신의 삶은 절박하다. 특히 사회적인 동물로 사는 우리에게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하는 삶은 무척이나 애틋하다. 그 애틋하고 뜨거운 우리의 세상 속에서 함께 서로의 존재가치를 사랑해주고 '표현'해 주는 것. 표현하지 못해 가늠할 수 없는 슬픔에 빠지기보다, 이제라도.


* 선험적: 칸트 철학의 근본 개념으로, 초월론적이라고도 함, 대상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선천적으로 가능한 대상 인식 방법에 관한 인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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