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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예지 Nov 12. 2019

너는 자라 겨우 내가 되겠지

스물 끝자락에 가서야 고개를 끄덕이는 말

여전히 꿈을 꾼다. 하지만 춥다. 뼈를 애리는 추위에 온 몸을 웅크린다. 기지개를 켜도 모자랄 판에 결국 차가운 현실의 벽에 마구 부딪힌다. 그렇게 꾸던 꿈을 말도 못 하고 삼켜버렸다. 어쩌다 이렇게 쓸모없는 인간이 된 건가 마구 자학하다 내 나이가 벌써 서른이나 되었다는 사실이 또 암담하다.


아이들에게 교실에서 하는 강의 내용은 대부분 이런 거다. '나를 사랑하자' '나를 아끼자' '상처를 받지 말자'와 같은 말. 나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다. 내가 못하는 것들을 지금 하려고 노력하는 것들을 아이들에게 교육한다. 왜냐하면 아이들은 나 같이 똑같은 길을 걷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중2병과 대2병은 다르다는 사실을 아니


대학에 입학하면 다 되는 줄 알았다. 나도 그랬다. 대학에 입학했으니까 취업은 쉽게 할 수 있을 거라고. 스물다섯 살이 되면 뭐라도 잘 해낼 수 있을 거라고. 서른이 되기 전에는 커리어우먼 정도 되는 건 껌이라고 생각했다.


스물아홉이 됐는데 이제야 내게 대2병이라는 무서운 병이 왔다. 대학교 2학년이 걸리는 병이라서 '대2병'이라 이름이 불리는 이 병은, 수능 만점자도 앓는 병이다. '나는 앞으로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해답을 찾지 못한 이들을 일컫는 신조어다.


미안. 졸업했는데도 대2병을 앓는 경우도 있어. 그렇다고.


그렇게 대2병을 앓는 우리들은 자존감이 바닥을 친다. 공부라는 하나의 목표를 향해 달려왔는데 그 목표가 사라지게 된 순간 나의 존재에 대한 고민이 시작된다. 12년 학교 생활에서 꿈이 뭐니, 진짜 하고 싶은 게 뭔지에 대한 근원적인 고민보다 먹고사는 문제와 연결한 '직업으로서의 꿈'을 강요한 어른들 덕분에 내가 뭘 좋아하는지 탐구하는 데까지 대학교를 졸업하고도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나 같은 이런 시행착오를 아이들이 겪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자꾸 묻고 또 물었다. "너네가 좋아하는 게 뭐야? 자는 거도 괜찮고, 자전거 타는 거도 괜찮고 다 괜찮아. 말해봐 봐." 대2병이 얼마나 무서운 병인지 체감하지 못하는 아이들은 지금 말 그대로 중2병을 앓고 있다. 자신감이 폭발하고 자존감이 높은 탓에 선생님의 말은 좀처럼 잘 들리는 법이 없었다.


꿈이라는 말은 교과서에 나오는 말 같아 싫었다. 손에 잡히지 않는 너무나도 이상적인 유토피아를 향한 말 같았다. 그냥 '좋아하는 일'을 생각해보자 했다. 그냥 내가 좋아하는 거. 사람이든 물건이든 꽃이든 생명이든 그 무엇이든지 간에. 갇혀 있는 사고를 하는 아이들은 그저 게임, 공부, 먹방보기. 그게 다 였다.


너는 자라 겨우 내가 되겠지


"부푼 꿈을 안고 대학에 입학했을 때만 해도 저는 제가 뭔가 창의적이고 세상에 보탬이 되는 일을 하며 살게 될 줄 알았어요. 그런데 보시다시피 지금 이게 나예요. 누군가 저한테 그래서 열심히 살았느냐 물어보면 '그렇다'라고 대답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어쩌다, 나, 이런 사람이 됐는지 모르겠어요."


김애란의 소설책인 <비행운> 단편 서른의 말이다. 내가 한 말인가 눈을 다시 비벼볼 정도로 마음을 관통한 문장이라 자꾸 따라 읽게 됐다. 지금의 나는 보잘것없는 아무것도 아닌 인간인 것 같아, 그저 평균의 축에도 끼지 못하는 내 모습이 처량해 보였다. 어쩌다 이런 사람이 된 건지.


어쩌다 나 이런 사람이 된 걸까. 비행운은 정말 아름다운데 비행기를 탄 나는 목적지가 없어.


스무 살 때부터 지금까지 정말 많은 일이 있었다. 우선 도합 일곱 번 이상의 퇴사를 했고. 수 십 개의 대외활동을 해봤고. 학교를 졸업했고. 몇 사람을 지옥으로 꺼지라고 원망도 해봤고. 예전에는 사람을 잘 믿고 따랐는데 서른이 되면서 사람을 믿는 게 제일 어렵다. 


오히려 극복이 더 어려워졌다. 사는 게 쉽지 않다는 걸 느끼면서 그냥 순수하게 내가 좋아하는 일만 바라보며 뿌듯함을 느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싶었다. 그래서 아이들에게도 이런 마음을 심어주고 싶었다. 나만의 바람일 뿐일까.


"너는 자라 겨우 내가 되겠지"


요즘 난 초조한 마음을 숨길 수 없다. 잘 해내려고 발버둥 치다가 갯벌로 빠져서 발도 못 뺄까 봐. 이번에 실패하면 이제 더 이상 도전하지 않을까 봐 싶었다. 적당히가 답인가 싶어 자꾸 겨우 자란 나를 외면하게 된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것도 없이 뭘 하며 살지 모르는 시시한 어른이 되지 않았으면 싶어서 시시한 어른이 교육을 한다. 아이들에게 내민 손을 쉽게 잡을 수 있는 건 나는 그만큼 시시한 어른이기 때문이다. 무얼 말해도 들어줄 수 있고 어떤 불행도 함께 공감해줄 수 있으니까. 너는 자라 겨우 내가 되겠지라는 이 말이 나에게는 통용됐더라도 나중을 살 아이들에게는 아니길. 바보같이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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