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자라 겨우 내가 되겠지

스물 끝자락에 가서야 고개를 끄덕이는 말

by 허예지

여전히 꿈을 꾼다. 하지만 춥다. 뼈를 애리는 추위에 온 몸을 웅크린다. 기지개를 켜도 모자랄 판에 결국 차가운 현실의 벽에 마구 부딪힌다. 그렇게 꾸던 꿈을 말도 못 하고 삼켜버렸다. 어쩌다 이렇게 쓸모없는 인간이 된 건가 마구 자학하다 내 나이가 벌써 서른이나 되었다는 사실이 또 암담하다.


아이들에게 교실에서 하는 강의 내용은 대부분 이런 거다. '나를 사랑하자' '나를 아끼자' '상처를 받지 말자'와 같은 말. 나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다. 내가 못하는 것들을 지금 하려고 노력하는 것들을 아이들에게 교육한다. 왜냐하면 아이들은 나 같이 똑같은 길을 걷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중2병과 대2병은 다르다는 사실을 아니


대학에 입학하면 다 되는 줄 알았다. 나도 그랬다. 대학에 입학했으니까 취업은 쉽게 할 수 있을 거라고. 스물다섯 살이 되면 뭐라도 잘 해낼 수 있을 거라고. 서른이 되기 전에는 커리어우먼 정도 되는 건 껌이라고 생각했다.


스물아홉이 됐는데 이제야 내게 대2병이라는 무서운 병이 왔다. 대학교 2학년이 걸리는 병이라서 '대2병'이라 이름이 불리는 이 병은, 수능 만점자도 앓는 병이다. '나는 앞으로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해답을 찾지 못한 이들을 일컫는 신조어다.


graduation-cap-3430714_1920.jpg 미안. 졸업했는데도 대2병을 앓는 경우도 있어. 그렇다고.


그렇게 대2병을 앓는 우리들은 자존감이 바닥을 친다. 공부라는 하나의 목표를 향해 달려왔는데 그 목표가 사라지게 된 순간 나의 존재에 대한 고민이 시작된다. 12년 학교 생활에서 꿈이 뭐니, 진짜 하고 싶은 게 뭔지에 대한 근원적인 고민보다 먹고사는 문제와 연결한 '직업으로서의 꿈'을 강요한 어른들 덕분에 내가 뭘 좋아하는지 탐구하는 데까지 대학교를 졸업하고도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나 같은 이런 시행착오를 아이들이 겪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자꾸 묻고 또 물었다. "너네가 좋아하는 게 뭐야? 자는 거도 괜찮고, 자전거 타는 거도 괜찮고 다 괜찮아. 말해봐 봐." 대2병이 얼마나 무서운 병인지 체감하지 못하는 아이들은 지금 말 그대로 중2병을 앓고 있다. 자신감이 폭발하고 자존감이 높은 탓에 선생님의 말은 좀처럼 잘 들리는 법이 없었다.


꿈이라는 말은 교과서에 나오는 말 같아 싫었다. 손에 잡히지 않는 너무나도 이상적인 유토피아를 향한 말 같았다. 그냥 '좋아하는 일'을 생각해보자 했다. 그냥 내가 좋아하는 거. 사람이든 물건이든 꽃이든 생명이든 그 무엇이든지 간에. 갇혀 있는 사고를 하는 아이들은 그저 게임, 공부, 먹방보기. 그게 다 였다.


너는 자라 겨우 내가 되겠지


"부푼 꿈을 안고 대학에 입학했을 때만 해도 저는 제가 뭔가 창의적이고 세상에 보탬이 되는 일을 하며 살게 될 줄 알았어요. 그런데 보시다시피 지금 이게 나예요. 누군가 저한테 그래서 열심히 살았느냐 물어보면 '그렇다'라고 대답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어쩌다, 나, 이런 사람이 됐는지 모르겠어요."


김애란의 소설책인 <비행운> 단편 서른의 말이다. 내가 한 말인가 눈을 다시 비벼볼 정도로 마음을 관통한 문장이라 자꾸 따라 읽게 됐다. 지금의 나는 보잘것없는 아무것도 아닌 인간인 것 같아, 그저 평균의 축에도 끼지 못하는 내 모습이 처량해 보였다. 어쩌다 이런 사람이 된 건지.


contrail-2412387_1920.jpg 어쩌다 나 이런 사람이 된 걸까. 비행운은 정말 아름다운데 비행기를 탄 나는 목적지가 없어.


스무 살 때부터 지금까지 정말 많은 일이 있었다. 우선 도합 일곱 번 이상의 퇴사를 했고. 수 십 개의 대외활동을 해봤고. 학교를 졸업했고. 몇 사람을 지옥으로 꺼지라고 원망도 해봤고. 예전에는 사람을 잘 믿고 따랐는데 서른이 되면서 사람을 믿는 게 제일 어렵다.


오히려 극복이 더 어려워졌다. 사는 게 쉽지 않다는 걸 느끼면서 그냥 순수하게 내가 좋아하는 일만 바라보며 뿌듯함을 느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싶었다. 그래서 아이들에게도 이런 마음을 심어주고 싶었다. 나만의 바람일 뿐일까.


"너는 자라 겨우 내가 되겠지"


요즘 난 초조한 마음을 숨길 수 없다. 잘 해내려고 발버둥 치다가 갯벌로 빠져서 발도 못 뺄까 봐. 이번에 실패하면 이제 더 이상 도전하지 않을까 봐 싶었다. 적당히가 답인가 싶어 자꾸 겨우 자란 나를 외면하게 된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것도 없이 뭘 하며 살지 모르는 시시한 어른이 되지 않았으면 싶어서 시시한 어른이 교육을 한다. 아이들에게 내민 손을 쉽게 잡을 수 있는 건 나는 그만큼 시시한 어른이기 때문이다. 무얼 말해도 들어줄 수 있고 어떤 불행도 함께 공감해줄 수 있으니까. 너는 자라 겨우 내가 되겠지라는 이 말이 나에게는 통용됐더라도 나중을 살 아이들에게는 아니길. 바보같이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