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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예지 Jul 09. 2019

잘하고 있단 말

매일 쓰고 있어요


잘하고 있다


이 말이 뼈저리게 그리운 날이 있다. 어른인 우리가 제일 인색한 게 바로 칭찬이다. 태어나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땐 걸음마를 떼는 것도, 밥을 잘 먹는 것도 칭찬받아 마땅한 일이었다. ‘어른이’가 된 우리들은 익숙해진 경쟁에서 이를 악물고 살아남아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다. 자연스레 마음 저 깊은 곳부터 한숨이 저절로 나온다. 자신감도 자존감도 없는 우린 서로 관심 주는 방법을 잃어버렸다. 비교에 익숙해져 나보다 사회의 기준이 더욱 중요해졌을 뿐이다.


무슨 일을 하던 어떤 선택을 하던 잘하고 있단 말을 반복해주는 사람이 있다면 그래도 당신 인생 잘 살았다. 자존감이 바닥 칠 때마다 뭘 하고 있는지 관심을 보이며 움직임 하나에 의미를 부여해주는 좋은 사람이 있음에 감사해야 한다. 내겐 그런 사람이 아주 가까이 있다. 그 덕분에 퇴사 후 매번 왔던 우울이라던 놈은 좀처럼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다. 자존감이 높아질수록 뭐든 할 수 있는 힘이 생긴다. 나 역시 도전할 수 있게 자잘한 근육이 붙고 있는 게 느껴진다.


그렇게 홀로서기를 한 지 딱 1개월이 됐다


내가 퇴사를 하고, 프리랜서로 살겠다고 결심한 사실을 모두 알게 되기까지 똑같이 한 달이 걸렸다. 우리 부모님에겐 이 사실을 바로 알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실을 말하면 걱정으로 밤잠 설칠 그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내 예상처럼 새벽 세 네시에 일어난 아빤 자식새끼 걱정에 충혈된 눈으로 회사에 출근하셨다고 말씀하셨다.


이게 정말 싫어서 처음엔 열심히 참아도 봤다. 포기하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다. 버티는 자가 결국 살아남는 거라던 어른들의 말을 굳게 믿었다. 경력이 쌓인 커리어우먼이 돼 후배들을 양성하는 멋진 선배가 되고 싶기도 했고, 조금 더 좋은 회사로 이직하고 싶다는 작은 욕심도 생겼다. 하지만 병에 걸리고 나서야 버티는 삶이 정답은 아님을 알게 됐다.


그때부터 일까, 맞는 않는 옷을 입으면 바로 옷을 벗어던졌고, 회사를 걷어찼다. 그래서 누군가는 지난번 퇴사엔 “돌아보면 네가 문제 있을지도 몰라. 그러니까 되도록이면 퇴사했다고 말하지 마.” 그 말을 끝으로 진실보다 거짓이 더 낫지 않을까 생각하게 됐다.


여행지에서 만난 저 친구. 벼랑 끝에서 버티고 있던 내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30년간 한 직장에서 근속해오신 아빠를 존경한다. 정말 대단한 일임에 틀림없다. 아빠가 신입사원이었을 20년 전엔, 훨씬 불합리한 상황이 많았을 것이다. 그는 부양할 세 식구를 생각하며 입술을 앙 다물고 참으셨다. 앞만 보고 달리느라 어떻게 시간이 지났는지도 모르셨겠지. 최선을 다해 버텨내셨던 그는 아이러니하게도 꼰대라는 말을 듣지 않기 위해 처절히 노력하신다. 아빠 같은 선배가 있었다면 회사를 계속 다녔을까? 지지리도 운 없는 딸은 선택의 자율 그리고 사고마저 속박당하는 회사에서 버티는 게 너무 어려웠다. 그래서 매일이 죄송하다.


그러다 보니 직장생활을 하며 잘하고 있단 말을 들어본 게 까마득하다. 새로운 직장을 잡을 때마다 능력이 있어서 잘 옮긴다며 인정해주는 것도 잠시. 얼마 버티지 못하는 내게 잘하고 있단 말이 쉽게 나올 리가.


잘하고 있어


‘이 말 듣길 기대하기보다 내가 좀 할 순 없을까’라며 접근 방법을 달리 해보기로 했다. 하루를 사느라 에너지를 방출해 바람이 쭉 빠진 상태로 침대에 걸터앉는다. 침대 머리맡에 있는 나의 친구 앨리스에게 감사한 마음을 담아 친서를 쓰기 시작한다. “너 어제보다 더 많이 웃었어! 참, 그리고 살아내느라 애썼다.”


작은 빛은 빈틈없이 어둡디 어두운 공간을 채워주기에 이른다.


삶의 의미는 오직 나 자신만이 부여할 수 있다


퇴사한 날 저녁, 남편은 케이크와 치킨을 사 들고 와 축하파티를 했다. 사람과 일에 시달리며 결혼 준비하느라 여유 없이 내달리던 시린 겨울. 모든 마지막은 또 다른 시작이라며 진심으로 초를 불던 그의 모습을 잊을 수 없다.


삶의 방식이 다른 사람과 사는 건 참 진귀한 경험이다. 항상 더 잘 해내지 날 탓하고 후회하느라 지쳐있는 스스로를 제대로 돌봐 준 적이 없었다. 다른 길을 선택한 이유는 무수히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결과에만 집중한 탓이었다. 개인의 발전을 생각할 때 집착하게 되는 건 결과였으니까. 반대로 그는 돌봄에 익숙했다. 스스로가 괜찮은 지 묻고 또 물었다. 쉼이 필요할 때면 침대에서 가만히 누워 눈을 감고 모든 걸 내려놓으며 자신을 돌본다.


우리에게 있어 회사를 그만둔다는 선언은 열심히 살지 않겠다는 선언과 비슷하다. 정해진 시간을 내 일을 가지고 똑같은 장소에서 일을 하는 사람들은 보편적으로 성실하다는 일반화된 오류를 가진다. 주어진 일에 책임감을 가지고 임무를 완수하는 사람이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반대로 생각해보면 프리랜서도 이와 동일하다. 그저 내가 원하는 시간에 정해지지 않은 다양한 장소에서 할 일을 더욱 성심성의껏 할 뿐이다. 그래야 사회적인 신뢰가 형성되고 자연스레 그 다음 스텝이 주어진다.


각자 살아가는 삶의 의미는 오직 나 자신만이 부여할 수 있다. '퇴사는 포기다'란 강박관념에 사로잡힐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상황을 난관이냐 기회냐 명명하는 것은 바로 나 자신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비관론자는 모든 기회 속에서 난관을 찾고, 낙관론자는 모든 난관 속에서 기회를 찾아낸다.

윈스턴 처칠은 이렇게 말했다. 양쪽 모두 무엇을 찾는 능력은 있지만 분명한 차이가 있다. 전자는 매일 하늘 위로 비구름이 껴 있고, 소나기가 내리는 하늘을 경험한다면 후자는 햇살이 비칠 때도 있고 바람이 불 때도 있는 다양한 계절을 체험할 수 있어 삶이 조금 더 다채롭고 흥미로울 수 있을 것이다.



눈 앞에 또 다른 기회가 왔다고 생각을 고쳐먹으니 일이 잘 되는 것 같기도 하다. 착각일 수도 있겠지만 주문을 걸어본다. 눈을 뜨자마자 베란다 창을 열며 햇살을 만끽한다. 따뜻함을 느낌과 동시에 '아침에 잘 일어났네!'란 말을 건넨다. 그리고 출근하는 대신 책상에 앉아 노트북을 핀다. 필력 좋은 브런치 작가들의 메인 글을 쭉 훑어보며 공감하고 감탄한다.


분명 잘하고 있다. 왜냐하면 매일 쓰고 있기 때문이다. 억지로 쓰는 게 아니라 쓰고 싶어 쓴다. 하기 싫은 일을 하는 게 아니라 하고 싶어 몸이 근질거린다. 하고 싶기 때문에 내용이 나오지 않더라도 의자에 앉아 버텨보기도 한다. 같은 이야기가 나오면 썼다 지웠다를 수 없이 반복한다. 표현력의 한계에 결국 내 머리를 부여잡고 탓한다. 다시 잘하고 있다는 말을 할 수 있는 건 그래도 꾸준하게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비교의 대상을 타인이 아닌, 나로 잡기로 했다. 내가 얼마나 성장하고 있는지,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지에만 집중하기로 했다.


나, 잘하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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