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허예지 Jun 24. 2019

끊어지기 직전에 글쓰기를 잡았다

우울을 씁니다

사는 것에 의미를 찾지 못하던 어느 날. 모든 걸 끊어버리고 싶었다. 일상의 모든 관계들, 해야 할 일들, 그리고 내 몸까지도. 퓨즈를 내리고 싶은데 어찌할지 모를 나날들의 반복이다. 상담을 받고 있지만 그다지 효과가 나타나지 않는 것 같았다. 그저 잠자는 시간만 행복했다. 증상을 호전시켜준다던 마중물인 약은 흡수되기 전까지 온 단어들을 헤집어놔 움직일 수 없게 만들었다.


단어를 풀어놓을 만한 탈출구가 절실했다. 친한 친구를 붙잡고 한탄을 해야 할지, 가족들에게 표현해야 할지. 개개인에게는 각자 고단한 삶이 있다. 딱히 좋은 방법이 생각나지 않았다. 그래도 내 얘길 잘 들어주는 건 내 남자 친구다. 군 생활하고 있는 남자 친구에게 오늘의 단어를 털어놓았다. 묵묵히 듣고 있던 그가 딱 한 마디 물었다.


"혹시, 요즘 쓰고 있어?"


편지를 얘기하는 걸까? 입대 초, 그립고 애틋한 마음을 담아 수 백통의 편지를 썼다. 최근에는 하루도 빼놓지 않고 전화 오는 그 덕분에 단어를 손으로 써 본 기억이 까마득하다. 그가 의미하는 건 편지가 아니었다. 내 머릿속에서 화수분처럼 끊임없이 새끼줄 치는 단어들을 정리할 글쓰기를 말하는 거였다.


대답 대신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오랜만에 나갈 채비를 하고 문구점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서점 문을 열자 경쾌한 종소리기 귀를 깨우고 뒤이어 코로 또 다른 자극이 이어졌다. 익숙한 종이 냄새. 어릴 적 매 주말마다 엄마와 함께 갔던 도서관에서 맡았던 비슷한 따뜻한 체취가 느껴진다. 이렇듯 냄새는 기억을 자극하고 나의 행동도 불러일으키는 훌륭한 도구다.


단어들이 마구 헤엄치는 공간, 서점.


잉크 향과 종이향을 그대로 집으로 가져가고 싶다는 충동이 강하게 들었다. 펜 코너를 종종걸음으로 지나쳐 노트와 다이어리 코너 앞에 섰다. 노트를 고르기 전엔 잠시 동안 핸드폰은 잠들게 해 준다. 새로운 노트와 만나는 순간에 연락이 오면 집중력은 흐트러지고 또다시 노트 찾기에 집중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나도 놓치지 않겠다는 일념 하에 맨 윗 칸부터 하나씩 꺼낸다. 유영하는 숨소리가 들리지 않고 공간에는 그 친구와 나뿐이다.


삼십 분쯤 지났을까. 내게 딱 맞는 친구가 될 노트를 찾았다. 앨리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였다. 디즈니 캐릭터 선호도 열 손가락 안에도 포함되지 않는 앨리스를 좋아하게 된 계기는 아이러니하게도 우울증을 준 회사 때문이다. 하나, 둘, 셋, 그렇게 사람이 싫어지면서 조직이라는 덩어리가 싫어지고 그렇게 고립된 섬에서 이상한 나라에 떨어진 앨리스가 된 느낌이 들었다. 


앨리스는 기존에 살던 곳에서 원더랜드로 들어와 환상적인 모험을 펼친다. 몸이 커지기도 하고 작아지기도 하면서 그녀는 무수한 질문을 던진다. 왜 그런 이유가 발생하는지, 서로 왜 그렇게 싸우는지. 그녀는 그 당시 시대적 도덕관에서 벗어나는 모험심 강한 소녀이자, 그를 통해 성장하는 자립심 강한 캐릭터이다. 


회사를 다니면서 앨리스가 된 난 무수한 질문을 던졌다. '왜 이렇게 예민한 걸까?' '불합리한 상황인데 그저 지켜봐야만 하는걸가?' 앨리스가 된 나를 바라본 사람들은 자꾸 나를 이상하게만 바라봤다. 질문하고 또 질문하는 나를 묵살하고 똑같은 방식대로 지나오며 내가 지내는 그 곳은 점점 더 이상한 나라가 됐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그렇게 내게 이상한 나라가 왔다.


하늘색 이상한 나라와 분홍색 이상한 나라가 손안에 있다. 이 노트처럼 내겐 두 세계가 필요했는지도 모르겠다. 현실세계와 내가 꿈꾸는 이상 세계. 그날 밤에는 분홍색 하늘에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언니와 식탁에 앉아 밥을 먹었고, 제일 사랑하는 남자 친구와 하늘을 날고 있었다. 불현듯 큰 태풍이 불어오는 날엔 하늘색 하늘을 펼쳐본다. 푸르른 하늘에 공기를 다 삼켜버리겠다는 듯이 몇 번 크게 심호흡을 하고 천장을 본다. 현실이다. 그래도 이 하늘에 크게 소리 지른 덕분에 마음속 단어들이 점점 소멸하고 있었다.


한 달 후 휴가 나온 남자 친구는 내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 "예전보다 말수가 많이 줄어들었네. 혼자 삼키고 있는 거 아니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이며 가방 안에 매일 가지고 다니던 분홍색 노트를 보여줬다. 안도의 한숨을 내쉰 그 역시 대답 대신 나를 꼭 껴안아주며 고개를 끄덕인다.


언어도 우주처럼 부름과 응답의 세계이다. 밀물과 썰물, 합일과 분리, 들숨과 날숨의 세계인 것이다. - 옥타비오 파스


인쇄된 종이 냄새를 맡으러 책 더미가 쌓여 있는 도서관으로 향한다. 좋은 책을 읽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은 던져버리고 그냥 제목에 꽂히거나 책 표지에 꽂히는 책을 옆에 쌓아둔다. 목차를 펼치고 읽고 싶은 부분만 골라 읽는다. 아주 신기하게도 내 마음에 꽂히는 월척 문장이 걸린다. 문장은 하늘색에도 분홍색에도 골고루 적혔다.


감정의 군상들이 모였다. 내가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 그리고 나를 괴롭혔던 단어와 마주할 용기가 생긴다. 조합도 해보고 찢어도 본다. 수동적이 아닌 자발적인 앨리스로 변하고 있었다. 그러고 나니 다시 폐포가 재생한 듯 호흡할 힘이 생겼다. 그렇게 끊어지기 직전에 단어 그리고 글쓰기를 잡았다.

매거진의 이전글 요가를 하며 땀을 흘린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