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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예지 Jan 18. 2020

그는 울지 않았다

예상을 벗어난 전개에 당황스러웠던 우리

서른이 되자 하나둘씩 친구들의 결혼 소식이 들려온다. 이번 주 토요일에도 청첩장을 받으러 간다. 결혼한 지 1년도 되지 않았지만 까마득한 느낌이 들어서 앨범을 들춰봤다. 활짝 웃고 있는 남편 앞에 앉아 있는 아빠도 그 못지않게 활짝 웃고 있었다. 그땐 알지 못했다. 내 마음이랑 아빠 마음이 똑같았다는 것을.


집들이로 놀러 온 친구들에겐 굳이 USB를 꺼내 텔레비전에 연결한다. 영상을 틀어 그 날의 온도를 다시 한번 확인해 본다. 그때마다 반복적으로 나오는 한 문장이 있다.


"아버님이 울지 않으셨단 말이지. 우리 다 아버님 우실까 봐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


때는 10년 전, 아빠 엄마와 함께 공지영 작가의 '우행시'<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을 보러 갔다. 뒷 자석에서 자꾸 의자를 발로 차는 탓에 영화에 집중을 못하고 뒤를 돌아보며 한껏 짜증 나 있음을 표현했다. 내 따가운 눈초리를 견디지 못한 뒷사람은 자꾸 눈을 피했다. 그런데 미안하다는 혹은 조심하겠다는 게 아니라 도무지 내가 이상하다는 눈초리였다.


몇 번을 생각해도 아빠가 이 영화만큼 울었던 영화가 없었던 것 같다.


혹시나 싶어 조심스레 옆자리를 바라봤다. 킁킁거리며 콧물을 닦는 소리가 들렸고 아빠를 바라보다 웃음이 터져 영화를 볼 수 없었다. 있는 힘껏 오열하고 있는 아빠의 온몸이 들썩거려 내 의자와 함께 그 줄에 앉아 있던 모든 사람들의 의자가 흔들렸던 것이다. 그 정도로 아빠는 본인의 감정에 솔직한 사람이다. 드라마를 보기 전에 휴지를 챙기는 사람은 엄마가 아닌 '아빠'였다. 그렇게 나와 나란히 앉은 아빠는 드라마를 보며 눈물 콧물을 훔치곤 했다.


결혼식 당일, 모두가 아빠의 눈을 바라봤다


이 사실을 아는 하객 모두는 결혼식 당일, 아빠와 나의 눈을 번갈아 보기 시작했다. 아빠 친구들 외에도 내 친구들 역시 걱정 어린 시선으로 그를 바라봤다. 일단 신부 입장의 고비를 넘겼고, 그 이후 아빠는 아주 꿋꿋이 잘 버텼다.


그에 반해 아빠 딸인 나는 신부 입장 때부터 말썽이었다. 목구멍에서 올라오는 울음 덩어리를 목젖으로 꾹꾹 누르다가 결국 혼인선언문을 읽을 때 조금씩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식순 동안 꽤 잘 참았다. 왈칵 터져버린 순간은 아니나 다를까. 아빠가 읽어준 시 한 편 때문이었다.


세월이 빨리 간다 그런 말 있었지요
강물같이 흘러간다 그런 말도 있었구요
우리 딸 어느새 자라 시집간다 그러네요

어려서 자랑자랑 품안에 안겨들고
봄바람 산들바람 신록 같던 그 아이
이제는 제 배필 찾아 묵은 둥지  떠난대요

신랑도 좋은 청년 같은 학교친구(선배) 사이
그동안 만나보니 맑은 마음 바른 행동
멀리서 보기만 해도 미더웁고 든든해라

애들아 하루하루 작은 일이 소중하다
사랑은 마음속에 숨겨놓은 난초화분
서로가 살펴주어야 예쁜 꽃이 핀단다

부모가 무엇을 더 바랄 것이 있겠느냐
다만 그저 두 사람 복되기 잘 살기를
손 모아 빌고 싶구나 양보하며 잘 살거라

- 시집가는 딸에게, 나태주


시를 읽는 동안 아빠 딸은 그렇게 아빠의 눈을 응시했고, 아빠는 펼쳐진 종이만 바라보며 물기 어린 목소리로 읽어 내려갔다. 아슬아슬했지만 아빠는 그렇게 한 편의 시를 완독 했다. 단 한 번도 아빠는 내 눈을 바라보지 않다가, 마지막이 돼서야 울고 있던 내 눈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식이 끝날 때까지 아빠는 단 한 번도 울지 않았다. 아빠 딸인 나는 조금 아쉽기도 했다. 엄청나게 복합적인 감정인데 반해 아빠는 그래도 '괜찮다는 게' 신기하면서도 한 편으로는 서운하기도 했다. 마지막에 알게 된 건, 그렇게 참던 아빠는 어딘가로 사라져 있다가 마지막에 신혼여행으로 떠나는 나를 배웅해 줄 때가 돼서야 나타났다는 사실이었다.


아빠를 마주보고 손을 잡을때부터 눈물이 났던 것 같다.


딸의 1호 팬 우리 아빠는요


아빠는 혀를 내두를 정도 딸바보다. 여전히 딸의 일이라면 본인의 일을 만사 제쳐두고 휴가를 내는 아빠는 딸의 재롱잔치부터 시작해 운동회까지 학교의 큰 행사에는 빠진 걸 한 손에 꼽을 정도다. 내게 좋은 일이 있다거나 주변 지인의 지원이 필요한 일이 있다 싶으면 무조건 주변 사람들에게 먼저 연락한다.


감정표현에 능한 아빠는 의외로 현실적인 지점에서는 내게 쉽게 말하지 못했다. 프리랜서를 선언하고 나서 한동안 말이 없었던 그는 몇 날 며칠을 밤 잠을 설쳤다고 했다. 혹시라도 힘들면 어떡하지. 우리 딸이 지치면 어떡하지. 감정 표현을 잘한다고 해서 모든 걸 말할 수 없었다던 그는 여전히 나를 믿어주기로 했다.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요령 없이 성실하게 살아온 아빠가 답답해 보일 때도 있었다. 그런데 참 이상하게 그 아빠에 그 딸이라고 나도 아빠와 똑같다. 요령 없이 그냥 있는 힘껏 열심히 살 줄만 안다. 6개월이라는 오랜 기간 동안 성실하게 준비하고 노력해온 일이 꼬꾸라졌을 때 생각났던 건 왜 아빠의 얼굴이었을까.


그 날이 지나고 그다음 날이 지나도록 아빠는 전화가 없었다. 그냥 점심을 먹는 엄마에게 위로를 부탁했을 뿐. 그래도 안다. 지금 이렇게 꼬꾸라졌더라도 언젠가 아빠처럼 묵묵하게 그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게 되면 어느 누구든 그 사람을 사랑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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