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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예지 Jun 10. 2019

독립을 결심하다

집을 의미 짓다


집에 머무르는 시간이 늘어났다. 일주일에 절반을 집에 틀어박혀 있었다. 친구들은 '늦잠 자서 좋겠다! 엄마가 맛있는 거 많이 해주시지?'라며 부러움을 감추지 않았다. 그들의 기대와는 달리 좀처럼 편하지 않았다. 오히려 집에 있는 시간이 더 힘겨웠다. 어떤 선택이던 나를 신뢰하던 부모님은 이번 퇴사를 계기로 나에 대한 신뢰를 접은 듯 보였기 때문이다. 회사에서 받아온 상처를 내가 머무르는 집에서 치유받고 싶었지만, 그 공간이 오히려 나를 무너지게 만들었다. 내 존재 자체를 부정하기 시작했다.


해가 중천에 뜨기 직전에야 느지막이 이불을 걷고 주방으로 나선다. 안방에서 컴퓨터를 하고 있는 엄마의 뒷모습을 확인하고 냉장고를 연다. 밥솥에 있는 밥을 푸고 반찬을 꺼낸다. '엄마 밥 먹을게~'라는 말 대신 묵묵히 식탁에 앉아 수저를 둔다. 집에서 밥을 먹으면 세 번 중 한 번꼴로 체했다. 스트레스가 뭉쳐서 소화 효소 구멍을 틀어막아버린 듯했다.


고개를 푹 숙이고 물을 마시러 주방으로 가기 일쑤다.


함께 있어도 혼자였다. 혼자 있는 고독보다 가족에게서 오는 고독이 더 외로웠다. 밥을 먹으며 대화할 주제가 없었다. 예전 우리의 대화 주제는 나의 회사생활이었다. 큰 딸의 의무감 때문이었을까, 잘하고 있다는 사실만 부각해 말씀드렸었다. 사실대로 내 감정을 토로하는 방법을 잃어버렸다. 더 힘든 지금은 내 감정의 무게를 부모님에게 옮길 수 없었다.


부모님은 이따금씩 내 미래를 걱정하셨다. 다른 회사에 지원서는 넣고 있는지, 면접은 보러 다니고 있는지에 대해. 현실적인 질문 앞에서 담담해지는 척을 할 수밖에 없었다. 점점 더 혼자 지내고 싶었다. 내 생각을 정리하고 '진정으로 원하는 삶'에 대해 마음의 소리를 듣는 공간이 절실히 필요했다.




우리에게 집은 어떤 공간일까? 우선 집의 사전적 의미를 짚고 넘어가 보자. 먼저 사람이 그 안에서 먹고 자고 생활하기 위해, 일정한 공간과 구조를 갖추어 지은 것이다. 또 다른 것은 일정한 곳에서 한데 모여 사는 가족의 동아리, 또는 그 생활공간을 의미한다. 그리고 기존 집은 자본의 뿌리였다. 대출을 받아 아파트를 구매하더라도 이득이라고 할 정도로 몇 년 후면 값어치가 상승했기 때문이다. 본래 집은 '거주 공간'이지만 현대인들은 경제적인 의미에만 몰두했다. 집이 역세권인지 교육의 메카인지에 따라 집 값 상승률이 다르다는 것들이 우리에겐 중요했다.


몇 년 전까지 집은 그저 가족을 위한 공간이었다면, 지금은 '나'를 위한 취향의 공간으로 변화했다


이제 집의 의미는 변화하고 있다. 먼저 집은 취향을 드러내는 공간이다. 나를 위해 소비하는 공간이 되었다. 나만의 공간을 꾸미는데 재미를 느끼는 청춘들 사이에서 셀프 인테리어 열풍이 불고 있다. 오늘의 집과 원룸만들기 등의 인테리어 관련 플랫폼의 성장에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다. 개인적 취향을 담은 공간에서 나만의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그만큼 집은 나의 매일을 차곡차곡 기록하는 곳이 되어가고 있다.


따로 또 같이를 실현하는 곳이다. 과거 청춘은 하숙과 자취 혹은 기숙사 생활을 했다. 셰어하우스라는 주거 방식이 생겨났다. 넓은 공간을 공동으로 사용하는 것으로 각자 방은 따로 쓰고 거실, 주방, 화장실 등은 공용으로 사용하는 것이다. 1인 가구에게 주거 비용은 큰 부담이 된다. 셰어 하우스는 작은 비용으로 질 높은 주거 공간을 확보할 수 있는 방법이자, 1인 가구의 외로움도 해소할 수 있는 것이다.


“세계 안에서 살아가고 그 안에서 자신의 과제를 수행할 수 있기 위해서는, 인간이 외부세계와의 싸움에서 지쳤을 때, 돌아가서 긴장을 풀고 다시 나갈 수 있는 평온함의 공간을 필요로 한다(Bollnow 1963, 7 1994: 136).”


독일 철학자인 볼노프는 공간의 인간화를 주장하고, 더 나아가 자신의 공간을 자신만의 고유한 방법으로 형성해야 할 공간적 책임을 주장한다. 오직 인간은 거주함을 통해 비로소 진정한 인간일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인간이 사적인 공간을 소유한다는 것의 의미는 정신 건강을 위해 불가결한 조건이다. 그만큼 그는 집은 내적으로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갈 수 있는 곳임을 강조했다.


그만큼 내 방은 나 자신의 라이프 스타일을 반영한다. 무의식적으로 내가 좋아하는 색깔과 질료를 토대로 방을 꾸민다. 우드톤의 포근함을 좋아하는 난 책상부터 테이블까지 나무색으로 통일했다. 한쪽 벽은 책으로 가득 차 있다. 그리고 쓰지도 않은 새 메모지가 책장 한 켠에 쌓여있다. 이렇게 개인적인 취향의 흔적이 남겨졌다. 매주 서점에 가 한 권씩 책을 사는 것부터 필기 욕구를 일으킬만한 메모지를 구매하는 습관이 있다. 그리고 매일 연필을 깎아 의미 있는 문장을 적어 내려 간다.


집에 있는 시간이 힘겨워질수록 흔적이 사라진다. 볼노프가 이야기한 사적인 공간을 소유한다는 것이 모호해졌다. 일단 매일 연필을 깎지 않았다. 책장에 빼곡히 쌓여있던 책들은 한 두 권씩 자취를 감췄다. 읽었던 모든 것이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고 내 존재가 불투명했기 때문이다.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에서 ”거주란 인간이 스스로 존재를 지키고 돌보는 상태를 의미한다”고 말했다. 거주함은 단순히 한 공간에 있는 것이 아닌 인간 본연의 존재가 자연과 친밀한 관계를 맺을 때 진실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내'라고 하는 것은 세계와 인간 현존재를 매개한다. 환경, 즉 세계는 이미 보았듯이 인간이 그 안에서 살고 있는 그곳이었다."라고 말했다.


이렇게 거주의 공간인 '집'이 정서적으로 끼치는 영향이 매우 크다는 것을 깨달았다. 거주함을 통해 비로소 진정한 나를 찾고 싶었다. 나만의 공간에서 내 취향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것의 꿈을 꾼다. 청춘에겐 지금 세상의 온갖 풍파를 겪고 나서 내 몸을 온전히 내어 줄 공간이 필요하다.


가장 보통의 청춘의 경험과 철학을 함께 이야기합니다. 청춘으로 고민했던 무수한 시간에서 제게 철학은 불안함을 해소해준 실낱같은 존재였습니다. 저와 같은 가장 보통의 청춘과 그들을 이해하고 싶은 어른들에게 이 이야기를 바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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