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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예지 Jun 13. 2019

쓸데없는 '기우'란 없다

행복과 욕망 사이의 <기생충>


스토리의 결말을 마주하면 하나의 느낌에 압도되는 편이다. 하지만 그 날은 예외였다. 여러 가지 느낌이 중첩돼 개운하지 않았다. 한 손에 팸플릿을 들고 크레딧이 끝까지 올라오고 불이 켜질 때까지 앉아 기다렸다. 손에 들고 있던 팸플릿 첫 장을 확인했다. "행복은 나눌수록 커지잖아요."


그렇게, 한동안 팸플릿을 손에서 놓지 못했다.



행복은 자연스레 우리 삶의 목적이 되었다. 행복 강박증에 사로잡힌 우리들은 지금도 행복을 과시한다. 소셜미디어의 스크롤을 내리다 보면 나만 행복하지 않은 것 같아 불행하지 않은가? 매일 예쁜 옷을 입고 있는 친구, 태어날 때부터 빼어난 미모가 있는 친구, 이번 여름에도 또 해외여행을 다녀온 친구. 이렇게 우리는 행복에 저당 잡혀 산다. 우리가 아주 잘 아는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은 인간의 최고 선(善)이다. 사람은 행복하기 위해 산다"라고 말했다. 그는 행복을 목적으로 두었다. 행복이 우리의 현실적 삶과 구체적 행위를 통해 쉽게 증명할 수 있는 근거를 내세웠다. 그렇다면 결국 행복은 목적이 되는 게 맞는 걸까?


영화 <기생충>은 그놈의 돌덩이와 시작된다. 민혁(박서준)은 기우(최우식)에게 고액과외를 부탁한다."대학생도 아닌 내가 과외를 가르칠 수 있을까?"라고 말하는 기우에게 민혁은 '그건 그저 기우'라고 말한다. 그리고 민혁은 과외를 하기로 한 그에게 민혁은 돌덩이를 하나 건넨다. 민혁의 가문에 행운을 가져다준 게 바로 그 돌덩이(수석)때문이란다. 철석같이 행운의 돌덩이라 믿던 기우는 욕망의 언덕을 향해 기어 올라간다. 하지만, '기우'라고 불리는 이름처럼 쓸 때 없는 걱정이 아닌, 그로만 치부하기엔 너무 지독한 욕망이었다.


그 수석은 행복을 가져다준 행운의 그것일까? (사진: CJ엔터테인먼트)


자신의 이름과 닮은 걱정을 숨기기 위해 그는 뻔뻔해지기로 결심한다. 아무렇지 않게 대학 문서를 위조하며, '저는 이게 잘못됐다고 생각하지 않아요.'라고 말하던 그에게 '너는 계획이 다 있구나'를 말하는 기택의 모습이 클로즈업된다. 직업도 없고 대책도 없던 전원 백수 네 가족에게 어느 순간 웃음이 만발했다. 반 지하방에 앉아 맥주 캔을 따던 그들은 행복을 위해 구체적인 계획을 세운다. 대학 문서 위조에 이어 가족들을 하나둘씩 박사장의 집으로 입성하기 위해 그들은 비정상적인 행위를 하기에 이른다.


박 사장 집 사모님의 성향을 파악하고 나서 기택네는 타인의 약점을 하나하나 이용했다. 이때 기택네에게 해주고 싶은 한 문장이 떠올랐다. "목적은 수단을 정당화할 수 없다." 마키아밸리의 이 말은 물론 정치적 상황을 빗대어 말했지만, 우리네 삶 속에서도 쓰여야 하는 문장임에 틀림없다.


행복하고자 한 일인데, 그저 행복하려고 한 일인데 말이에요. (사진: CJ엔터테인먼트)


아리스토텔레스는 기택네 가족이 가난을 벗어나 행복에 도달하고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행동을 과연 올바른 행동이라고 판단할까? 아니다, 그는 기택네 가족에게 잘못됐다고 강하게 말해줄 것이다. 그는 습관화한 덕인 중용을 말했다. 곧,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완결된 도덕적 본성을 갖추고 태어나지 않기 때문에 끊임없이 노력해야 함을 강조했다.


그는 인간의 영혼인 이성적인 요소를 지적인 덕과 도덕적인 것 두 가지로 구분하였다. 지적인 덕이란 선천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철학적 지혜나, 이해력, 실천적 지혜와 같은 지적인 덕은 지속적인 훈련과 반복적인 실천행위를 통해 한 개인의 '인격(혹은 성품)'으로 완성한다. 나머지 도덕적인 덕은 절제와 온화함으로 이 역시 끊임없는 실천을 통해 완성되는 것이다.


이쯤에서 인간의 영혼을 논할 땐 또 다른 주인공 박사장 가족을 빼놓을 수 없다. 앞에서 품위 있고 격식 있는 척하지만 그들끼리 있을 때면 '(계)급'을 논하는 그들. 박사장의 성공을 통해 돈이라는 물질을 획득함과 동시에 그들은 영혼을 기르기 위한 끊임없는 실천을 저버렸다. 나 중심적인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에 자신들의 편의에 따라 쉽게 사람들을 해고했다. 그에 따라 생존의 동아줄이라 여겨졌던 삶의 현장에서 내처진 그들은 인간 그 이하로 살고 있다.



<기생충>을 보며 또 다른 철학자가 떠올랐다. 지독한 염세주의자 쇼펜하우어는 이성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의지야말로 모든 고통의 근원임을 말했다. 이렇듯 그는 의지에 기초해 세계를 파악한다. 근데 철학의 뿌리였던 계몽주의, 주지주의 그리고 독일의 관념론에서 신뢰했던 이성과 합리주의를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반이성주의자다. 그는 맹목적인 의지란 영원하여 진정될 수 없다고 한다. 이 때문에 우리 삶이 고통스러운 것이며 무의미함을 주장했다.


한 마리 제비가 왔다고 해서 봄이 되지 않는 것처럼, 또 하루아침에 여름이 되는 것도 아닌 것처럼 인간이 축복받거나 행복하게 되는 것은 하루나 짧은 시일 안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쇼펜하우어


기존의 서양철학에 맞서는 상남자 같은 쇼펜하우어, 이미지를 통해서도 이를 파악할 수 있다.


쇼펜하우어에 따르면, 아주 우연히 고액 과외 선생님이 된 기우의 '돈'에 대한 욕망과 '계층 상승'에 대한 맹목적인 의지가 발현함에 따라, 그들의 기생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그렇다면 영화 속 인물들은 어떻게 최악의 세계에서 해방될 수 있을까? 이는 쇼펜하우어의 철학 속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을 듯하다. 고통과 고뇌로부터 구제받기 위해서는 금욕주의적인 충실한 삶을 실천하고, 이성의 영향 바깥에 있는 의지의 부정을 통해 삶의 궁극적 가치를 발견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즉, 더 이상 욕망의 충동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우리 삶의 목적이 되어야 한다. 일단 쇼펜하우어도 생의 의지를 가지고 이 괴로운 세상을 치열하게 저항할 각오를 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보다 더 중요한 건 내게 엄습해 오는 고통을 이겨내는 무기는 명상을 통해 고통을 일상인 듯 여기며 깜짝하지 않는 것이다. 이는 곧 잘 살아야겠다는 의지 부정의 한 형태이기도 하지만, 더 이상 욕망의 충동이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의미다.


결국, 위의 모든 고통은 <돈>이라는 맹목적인 의지를 통해 <행복>이라는 목적을 이뤄내려는 그들의 이기주의적인 욕망을 통해 시작되었음을 볼 수 있다. 그들은 고통을 일으킨 '돈'이라는 의지를 소멸시키는 것이어야 말로 삶의 목적이 되었어야 했다.


그렇다고 모든 탓을 기택 가족에게만 돌릴 수 있을까? 만약 박사장네도 쇼펜하우어의 말처럼 사람에 대한 동정과 공감이 있었다면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자신들의 삶의 안위를 위해 도와주는 사람들에 대한 이해와 포용이 있었더라면 최악의 사건이 발생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의지의 소망은 끝이 없고, 의지의 요구는 멈추는 법이 없다. <기생충>에서 확인했듯 욕망의 충족은 또 다른 욕망을 낳는다. 세상 그 어떤 만족감도 욕망의 심연을 채워주지 못한다. 물론 지금 이런 말을 하고 있는 나 역시도 욕망하고 있고 또 다른 욕망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아주 나약한 인간이다. 참, 그리고 쓸데없는 '기우'란 없다.


가장 보통의 청춘의 경험과 철학을 함께 이야기합니다. 청춘으로 고민했던 무수한 시간에서 제게 철학은 불안함을 해소해준 실낱같은 존재였습니다. 저와 같은 가장 보통의 청춘과 그들을 이해하고 싶은 어른들에게 이 이야기를 바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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