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년 여행초보, 발리 2019

by 도연


새벽 5시 비행을 앞두고 새벽 2시에 집을 나섰다. 출출해져서 우유를 하나 먹고 출발했다. 유통기한이 10일이나 지난 걸 알았지만... 원샷! 과거의 나는(지금 나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 유통기한이 지난 음식에 굉장히 예민했다. 엄마가 해준 반찬이나 밥이 하루 이틀이 지났다면 거들떠도 보지 않고 새로 한 밥과 국, 반찬들만 내놓으라고 하는 고집불통이었다. 그리고 꼭 밥은 한 숟가락을 남긴다. 누가 준 반찬은 먹지 않고 오로지 엄마가 만든 음식만 먹는 예민맨이었다. 엄마는 넌 참 피곤한 사람이라고 했다. 지금도 그 고집이 많이 꺾이진 않았지만, 혼자 오래 살다 보니 뭐든 아까워서 끝까지 먹고 냄새가 좀 나는 것 같아도 꾸역꾸역 다 먹어치우는 편이 되었다.


"화장실을 만나기 전 100미터 전"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배가 살살 아프기 시작한다. 뱃속의 소리가 심상치 않다. 고양이 배를 긁으면 나는 그르렁 거리는 소리, 오묘하고도 불길한 소리. 얼른 체크인을 마쳤다. 그 사이에도 내 대장 속 고양이는 계속 배를 긁어댔지만 식은땀이 날 정도로 급박한 건 아닌 것 같아, 방콕행 비행기로 향했다. 하지만 불길한 예감은 역시 틀리지 않는다. 도착과 동시에 대장에서 번개가 친다. 지금 한국엔 번개를 동반한 폭우가 쏟아진다는데, 나의 대장은 아직도 한국에 머물러 있는 게 분명해! 다들 출국장으로 향하는데 혼자서 transfer로 향했다. 아무도 환승하는 사람이 없네. 괜히 외롭네 거 참. 하지만 외롭고 나발이고 난 어서 화장실을 찾아야 해! 도착과 동시에 화장실로 향해서 지난밤 먹은 열흘이 지난 우유를 비워내고, 다시 가벼운 마음으로 공항에서 9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태국 돈므앙 공항은 몇 번 온 적이 있다. 그래서 환승 출국장도 익숙하고 편했다. 저기 멀리 스타벅스가 있으니까 커피를 한잔 먹어야겠다고 생각하고 걷는데 아니, 배에서 다시 번개가.. 분명 10분 전에 다 비웠는데 왜 이러니 너? 다시 뒤로... 화장실에서 또 10분... 아 드디어 커피를 먹으러.. 아.. 아니 잠깐.. 왜 또 번개가.. 장마인가.. 왜 이러지.. 이렇게 서너 번을 다시 화장실, 걷다가 다시 화장실을 몇 번 왔다 갔다 했다. 100미터 앞에 있는 스타벅스가 왜 이리 멀게만 느껴지는지.


시간을 낭비한다는 로맨틱한(?) 멘트로 시작한 여행이 설사병으로 시작하게 되다니, 참 여행이란 알 수 없구나. 역시 떠나야지만 알 수 있는 여행의 묘미다. 다행히도 챙겨 온 비상약으로 설사병은 금세 멈추었다.



결국 스타벅스로 왔다. 커피를 한잔 시키고 시간도 많이 남았으니 일이라도 좀 해볼까 하고 앉았는데 도무지 손에 잡히지 않는다. 사람들은 너무 바쁘고 서두르고 소란스러운데, 나만 일상인 것 같은 느낌. 나쁘진 않지만 왠지 나도 바빠야 할 것 같은 조급함이 든다. 언제나 여유롭고 느긋한 사람을 동경하고 그런 삶을 원했다. 성격이 급한 탓에 궁둥이가 들썩거려 한자리에 오래 못 앉아있고 말도 빨리 하는 나는, 시간이 이렇게나 많은데도 마음이 급하다. 커피를 급하게 마시고 간단히 일기를 쓰고, 뭐라도 해야지 싶다. 조급증은 고쳐지지 않는 불치병인 건가... 드라마도 한편 보고, 밀린 예능도 한 편 봤는데, 그래도 3시간이나 남았다. 출출해서 한국에서 가져온 샌드위치를 먹고 공항 여기저기를 오락가락하며 시간을 보냈다. 이렇게 공항에서 오래 머물러본 적이 있었나? 4년 전(아니 벌써 4년이나 지났다니... 세월이여...) 북유럽 캠핑여행 때 스웨덴 공항에서 아이슬란드로 가기 전 노숙을 한 생각이 났다. 그때도 새벽비행이라 어디 숙소에서 머무르기가 애매해서 공항에서 밤을 새웠다. 마지막 버스를 타고 공항으로 가 공항에서 세수도 하고 머리도 감고(진상) 의자에서 배낭을 베고 누워 잠을 잤다. 공항이 어찌나 깨끗하고 조용한지 괜히 목소리도 낮추고 조심조심 걸어 다닌 기억이 난다. 북유럽이라는 나라의 동경심 때문인지 살짝 주눅이 들어있었다. 치안은 또 어찌나 좋은지 가방을 두고 왔다 갔다 해도 그 누구도 우리 꾸질꾸질한 배낭을 거들떠도 보지 않았다. 여긴 어쩐지 가방을 놓고 가면 홀라당 없어질 것 같아 화장실 칸에도 캐리어를 넣고 들어가야 하지만 편안하다. 같은 아시아권이라 영어가 조금 서툴러도 당황하지 않고 천천히 설명할 수 있고, 한 두 번 와본 공항이라 낯설지 않아서 여행을 떠나온 기분은 덜하다.




"만년 여행 초보자"

보통의 사람들보다는 꽤나 여행을 자주 다니는 편임에도 늘 여행은 부담스럽다. 같은 나라를 반복적으로 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겠지만, 출국을 할 때도 입국을 할 때도 낯선 곳에서 택시를 잡아탈 때도 조금은 불안하고 겁이 난다. 집에서 출발하기 전 동거녀에게 말했다.

"오랜만에 혼자 떠나는 여행이라 그런지 나 좀 무서워"

"만약에 무서우면, 살짝 움츠렸다가 다시 어깨 피고 평소처럼 씩씩하게 다녀."

나는 꽤나 겁이 많은 편이다. 겁이 많으니 극복해보고자 자꾸 도전을 해보는 편이랄까?


여행은 언제나 초행길이고 매번 낯선 사람을 만난다. 가는 나라마다 온도가 다르고 문화가 다르고 사용하는 화폐마저도 다르다. 내가 원하는 것을 영어로 말할 줄 알아야 하고, 가끔은 영어가 안 먹히면 그 나라 말을 한 두 마디라도 배워야 한다.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실례합니다. 정도는 그 나라말로 하는 것이 상대를 기분 좋게 하는 방법일 수 있다. 어느 정도 예상을 하고 갔지만 매번 새로운 사건이 터지고 뜻하지 않은 일을 겪게 된다. 마치 내가 발리에 도착도 하기 전에 설사병에 걸린 것처럼. 앞으로 며칠간 또 새롭고 낯선 경험들을 하게 되겠지. 두려운 시간을 계속 맞닥뜨리고 또 그것을 극복하고 집으로 돌아와 안도하는 여행.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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