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해 2020
남해는 봄날이란 단어와 참 잘 어울린다. 남해의 봄날, 봄날의 남해 앞뒤로 바꿔보아도 좋다. 남해를 떠올리면 먼지 없는 파란 하늘과 바다가 먼저 생각나고 바다를 애워싼 섬들도 떠오른다. 남해는 처음이다. 통영에서 남해를 가려면 바다를 가로지르면 모를까, 버스를 타면 통영행 직항이 없어 진주를 경유해야지만 갈 수 있다. 통영에서 진주로 2시간, 또 진주에서 남해로 2시간. 서울에서 남해를 내려가는 것만큼이나 시간상 거리가 먼 곳이다. 같은 남해인데도 갈 엄두가 안나, 2년 가까이 통영에 살면서도 가보지 못했다. 경남 남해군은 느낌이 또 다르다. 통영의 구시가지인 강구안, 신시가지인 죽림을 기점으로 식당, 카페들이 즐비하다. 반면에 남해는 시내보다는 해안도로를 따라 마을들이 있고, 각 마을마다 맛집이나 근처 산사 등 볼거리가 있는 형태이다. 이번 여행은 남해에서 가보고 싶은 게스트하우스가 있어, 숙소에서만 뒹굴거릴 생각으로 떠나기로 했다. 전기장판으로 달궈진 침대 밖을 나오는 일이, 편안한 집을 떠나는 일이 왜 이렇게 귀찮기만 하던지. 평소에 좋아하는 여행도 어떤 때엔 숙제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래서 지역만 옮긴 후 숙소 침대에 누워있기로 작정하고 출발했다.
남해 삼동면의 동천마을에 오기까지 정확히 7시간이 걸렸다. 지하철을 타고, 또 시외버스를 타고, 군내 버스를 타고, 걸어서 얼마쯤. 마을 초입에 식당 몇 군데, 마트, 교회 하나와 초등학교가 있다. 학생수는 40명쯤 된단다. 아주 작은 마을이다. 동천마을 안쪽에 있는 ‘몽도’ 북 스테이는 서울에서 내려온 부부가 운영하는 게스트하우스다. 별채의 서재에 책이 가득하고 낮은 조도와 소이캔들의 나무 타는 소리는 사장님 내외가 틀어놓은 조용한 음악소리와 잘 어울린다. 놀라운 점은 내가 좋아하는 작가들의 책뿐 아니라, 나도 아직 읽지 못한 최근 작까지 모두 구비하고 계시다는 것. 서울보다 어쩌면 문학과 더 가까이 살게 되는 아이러니 일까. 지방에서 20년을 살았을 때는 지방이라서, 문화적인 혜택을 받지 못한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은 다 핑계일 뿐이란 걸 새삼 느낀다. 좋아하는 것들, 문화나 예술은 찾아서 하는 것이다. 현관문 앞으로 찾아오는 게 아니라.
동천마을에서 1시간에 1번씩 오는 군내 버스를 타고 20분쯤 거리에, ‘지족’이라는 마을 산책을 나섰다. 한 시간에 한 번 오는 구내버스를 시간에 맞춰 타고 지족 구거리에 내려주세요-했다. 이 곳 지족 구거리에는 도시에서 온 젊은 여행자들이 하나둘씩 터를 잡으며 거리의 생기를 불어넣고 있다. 연고지가 없는 곳에서 살아가는 게 얼마나 힘든지 잘 알고 있다. 익숙한 곳을 벗어나 낯선 곳에서 적응하는 일이 얼마나 사람 마음을 고되게 하는 지도. 그래서 이곳에서 버티고 있는 그들이 너무나도 대단하다. 또 한편으론 부럽다. 자신의 소신대로 살아가는 의지가 저리도 두터움에. 나는 이겨내지 못하고 다시 서울로 돌아왔기에 샘이 날 정도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나는 나대로 도시의 때를 덜 벗었고 어렸고 한참 미성숙했었으니.
라테는 말이야... 통영에서 1년 반 동안 한옥스테이 '잊음'을 운영했었다. 통영에 머물었던 시간이 분명히 삶의 터닝포인트가 되었지만, 사람들이 생각하는 만큼 사실은 로맨틱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아는 사람만 아는 비밀로 간직하고 있어서 털어놓을 기회가 별로 없었다. 봄에서 가을까지 잡초와 싸우고, 온갖 벌레들에 진절머리가 났으며, 쥐를 잡아야 했고 바퀴벌레를 박멸해야 했다. 게다가 작은 동네에 새로운 처녀의 등장은, 동네 노총각들의 핫이슈엿고, 그것을 불쾌하게 여기면서 불편한 관계까지 내 몫이 되었다. 온전한 내 집이 아닌 상태로 운영을 하다 보니 갈등까지 생기게 되면서 통영을 떠나게 되었는데 2년이 지난 지금은 그 모든 것이 미화되었다. 그 시절 만난 인연들은 나를 참 멋진 사람으로 기억해주었으며, 통영에서 만난 친구와는 여전히 막역한 사이로 지내고 있다. 옥상에 올라가 빨랫줄에 이불을 걸고, 누군가를 위해 방을 쓸고, 잘 마른 수건을 손바닥으로 평평하게 쓸어내는 일은 내가 제일 좋아하는 시간들이었다. 낯선 이들에게 정을 붙이고 겨우 정든 이들을 자꾸자꾸 떠나보냈다. 익숙해지지 않고, 여전히 헤어짐은 어렵다.
첫 번째 귀촌, 실패했지만 아직도 나는 시골에서 사는 삶을 꿈꾼다. 서울에서 4시간 30분, 남해의 작은 마을에 자리 잡은 이들이 선택한 삶에 응원을 보태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