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 잡러란?
2개 이상 복수를 뜻하는 ‘N’과 직업을 뜻하는 ‘job’, 사람을 뜻하는 ‘~러(er)’가 합쳐진 신조어로 ‘여러 직업을 가진 사람’이란 뜻이다. 본업 외에도 여러 부업과 취미활동을 즐기며 시대 변화에 언제든 대응할 수 있도록 전업(轉業)이나 겸업(兼業)을 하는 이들을 말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새로운 사람을 만날 때면 반드시 듣는 질문이 있죠. "하는 일이 어떻게 되세요?" 저는 이런 질문을 받을 때 대체로 상대가 이해하기 쉬운 대답을 합니다. "아, 네 전 디자이너예요." 심플한 디자이너라는 대답에도 따라오는 질문이 있습니다. "어떤 디자인을 하세요?" 홈페이지를 디자인해요, 라거나 책을 만드는 편집 디자인을 합니다.라는 답을 상대는 예상했겠지만, "돈 주면 아무거나 다 해요." 라며 슬쩍 넘겨버립니다. 홈페이지, 책, 뿐 아니라 모바일, 포스터, 이벤트 등 '올 그라운드 디자이너'이기 때문이죠. 뿐 아니라 디자인 강의를 겸업하고, 글도 쓰고 그림도 그리고 있습니다. 수입의 비율로 따져서 직업을 말해야 한다면 디자이너 혹은 디자인 강사이고, 마음을 쓰는 비율로 따진다면 작가 쪽으로 기울어지기도 합니다. n 잡러인 경우 직업을 말하기가 애매하고, 여러 개의 직업을 가졌다고 하면 따라오는 오해들이 있습니다. 여러 개의 직업을 갖게 된 이유와 그에 따르는 책임에 대해서 이야기할 충분한 시간이 없다면, 상대방은 그저 욕심 많고 끈기 없는 사람으로 치부할 뿐이었습니다. n 잡러에 대한 오해에 대해서 이야기해봅니다.
N 잡러는 끈기가 없어서 여러 개의 직업을 병행한다?
하나의 직업으로 30년을 넘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면 속해 있는 분야의 '장인'으로 칭송받죠. 결과가 얼마나 훌륭하냐 아니냐를 떠나, 묵묵하게 그 길을 오랜 시간 걸었다는 이유만으로도 존경받을 가치가 있습니다. 하지만 N 잡러에게는 끈기가 없어서 여러 가지 일을 한다는 편견이 있습니다. 일을 빠르게 그만두고 갈아타는 것이 N 잡러는 아닙니다. "언제부터 글을 쓰기 시작했나요?" 같은 질문은 꽤나 어렵습니다. 읽고 쓰기는 서른다섯 해 살면서 늘 했던 행위였으니까요. 어릴 적 매일 쓰던 일기장에서부터 좋아하는 연예인의 팬픽으로, 싸이월드 감성 충만 일기를 거쳐 네이버 블로그에 글을 썼습니다. 그 글들이 모여 원고가 되었고 출간까지 이어졌죠. 이후로도 평소에 쓰던 대로 지속적으로 글을 올리고 모으고 있습니다. 작가라는 호칭은 아직 어색하고 쑥스럽지만, 글 쓰는 사람이 갑자기 된 것은 아니라는 것이죠. 최근 "작가로서 글만 쓰기엔, 그동안 쌓아온 커리어나 미적 감각 너무 아깝지 않아요?"라는 질문도 받았습니다. 작가라는 타이틀을 달긴 했으나, 여전히 디자인을 하고 있습니다. 예술고등학교에서 서양화과를 졸업하고 산업디자인과로 진학해, 첫 취업 이후 11년째 디자인을 하고 있는데 아직도 "한 우물만 파라!"라는 이야기에서 자유롭지 못한 걸까요? 여러 개의 우물을 오랫동안 팠더니 디자이너로써도, 글 쓰는 사람, 그림 그리는 사람, 강의하는 사람으로 자리 잡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한 우물만 파는 것도 좋지만 여러 개의 우물을 오랫동안 꾸준히 파보는 것도 나쁘지 않아요.
욕심이 많아서, 하고 싶은 건 다 하려고 하는 걸까?
가끔 여러 가지 일을 하는 사람들을 보고 더러 '욕심이 많다, 하고 싶은 일을 어떻게 다 하면서 살 수가 있냐'며 비아냥 거리는 시선들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일부는 맞는 말이지만, 다재다능하고 가능성이 많은 사람이 반드시 한 가지의 분야를 선택하여 다른 가능성을 모두 배재하며 살아가야 할까요?
"왜 아이돌이 연기를 해?"라는 생각도 마찬가지죠. 유명세를 얻기 위해서 혹은 대형 소속사의 힘으로 저 역할을 꽤 차진 않았는지... 저 역시, 열심히 노력해도 빛을 보지 못하는 언더그라운드의 사람들을 기운 빠지게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 도전들에 쏟아지는 비난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겸업을 하며 성장해나가는 스타들을 보면 그저 이미지를 소비하는 아이돌, 연예인이 아닌 진정한 예술가로군, 하는 생각이 들어오더군요. 예술은 하나의 카테고리가 다른 카테고리로 연결되기 쉽습니다. 순수 회화를 하는 사람이 상업 디자인으로 넘어가기도 쉽고, 음악을 만들던 사람이 글로 마음을 옮기는 일도 적잖이 있습니다. 지인과의 대화에서 이런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제발, 못하면 좀 안 했으면 좋겠어. 자기 하고 싶은 건 다 하고 살아야 직성이 풀리나."
"그래. 이번 작품, 엄청 구리긴 하더라. 그런데 만약에 그 사람이 매번 더 나아지고 있다면? 그게 예술가의 성장통일지도 모르잖아."
"음, 그건 그래."
N 잡러도 처음부터 모든 직업을 완벽하게 다 소화하기가 어렵습니다. 살아가는 도중에 다른 직업을 경험하고 도전해보고, 그리고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위한 시간이 존재합니다. 우리가 처음 걸음마를 할 때, 사회초년생이었을 때, 첫 번째 연애를 했을 때 잦은 실수를 했던 것처럼 어설픔의 시간들이 존재합니다. 그런데 그 성장통에서 주저앉아버린다면 위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싫증을 느끼고 빨리 포기해버리는 사람이 될 뿐이죠. 어설펐던 시간들을 이겨내고 꽃을 피우는 시간까지 꾸준히 욕심내는 사람이 N 잡러 인 것 같아요. 그래서 저에겐 글 쓰는 일이 어설프지만 묵묵히, 꾸준히 해내야 하는 두번째 직업입니다. 지금으로부터 15년 정도 더 하면 50살쯤에는 꽃이 필지, 누가 안답니까?
이제 더 이상 나를 어떤 직업으로 규정하지 않으려 합니다. 어떤 틀 속에 가두고 왜 디자이너가 카페를 해? 왜 디자이너가 글을 써? 카페를 하는 사람이 포토샵 책을 내는 거야? 글 쓰는 사람이 왜 디자인을 해? 같은 질문들에 스스로 메여있지 않으려고요. 다음부터 누가 직업이 뭐냐고 묻는다면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지냅니다."라고 대답하려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