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남동에서 파나마로
채리에게
우울의 늪에서 벗어났다니 듣던 중 참으로 반가운 소리구나. 네 편지를 얼마나 기다렸는지 몰라. 지난 편지에도 썼듯이 요즘 나에게 활력소는 국제 펜팔이거든. 삶의 노잼 구간에 들어선 나는 요즘 내가 왜 이리 무기력한 지를 늘 생각하는데 그중 가장 큰 건 역시나 책임지던 것의 상실감이야.
매일 하던 산책의 의무, 2-3일에 한 번씩 하던 강아지 화식(건사료가 아닌 닭가슴살이나 고구마 따위를 익혀서 반려견의 밥을 준비하는 것), 2주에 한번 50만 원에 육박하던 약값과 6개월에 한 번씩 해야 하던 100만 원가량의 정기검진 비용을 벌지 않아도 되는 책임이 사라졌어. 그랬더니 열심히 살아야 하는 의무 1개가 사라져 버린 거야. 참 고통스럽고 지루하던 책임이었는데 그 의무가 사라지고 나니 인생이 루즈해져 버린 것 같아.
채리 엄마의 말처럼 개는 사람보다 먼저 죽으니까 키우지 않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지. 하지만 요즘도 매일 인스타그램의 댕댕이 스타 그램을 보고, 유기견 사이트들을 전전하며 예쁜 아이들을 데려오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단다. 물론 절대로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겠지만.
우리 엄마는 그런 말을 하더라. 내가 '도대체 왜 자꾸 아이를 낳으라고 하는 거야?'라고 했더니, '내가 죽고 싶던 순간들을 이겨낼 수 있게 해 준 힘'이었기 때문이라는 거야. 사람은 살면서 언제고 힘들고 지쳐서 삶을 놓아버리고 싶은 순간들이 찾아올 테고, 부모는 영원히 곁에 있어 줄 수 없으니, 네가 아이를 곁에 두고 언제고 삶이 힘들 때에 삶을 버티게 하는 '가족이란 힘'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대. 눈물이 핑 돌더라. 그건 어떤 기분일까 싶었어. 죽고 싶지 않게 하는 힘. 삶을 어떻게든 이어가도록 만드는 힘은, 정말로 숭고하고 대단하겠지.
네가 말한 결혼의 좋은 점은 하나도 와닿지 않는구나.(ㅋㅋㅋ) 우선 잠을 자고 있는데 안깨웠으면 좋겠고, 홀리데이에도 나는 외로워하는 편이 아니고, 나는 아플때 병원을 잘 안가. 것보다 누군가 곁에 있는데, 홀리데이에 나와 함께 보내주지 않거나, 아픈데 상대가 바쁘거나 눈치 채지 못한다면 마음까지 아프고 더 외로워 질 것 같아. 그런 말이 있잖아, 외로움이란 건 혼자 느끼는 게 아니라는 것. 혼자일 때 느끼지 않아도 될 외로움을 누군가와 함께 삶으로 인해서 느끼게 되는 것이 걱정된달까. 나는 비혼을 꿈꾸진 않아. 사랑하는 이와 평생토록 안정감이 동반된 행복한 삶을 꿈꾸는 사람이야. 결혼에 대해서 크게 비관적이지도 않고, 그저 두려움, 그것이었는데 네 말대로 나는 놀만큼 놀았고, 연애도 해볼 만큼 해봐서(미래의 남편이 알면 극혐 할 멘트?) 이제 다 재미가 없어. 그런데 결혼이란 네 말대로 물 흐르듯, 마치 결말이 예고된 영화처럼 흐르는 일이라고 생각해서. 크게 노력할 맘이 없는 것뿐이야. 이대로 무난하게 연애하고 별 탈 없이 시간이 흘러준다면 결혼까지도 가능하겠지? 그러니까 혹시 우리 엄마가 DM 오거든 가만히 좀 내버려두라고 전해줄래? :)
어제도 술을 한잔 했는데, 숙취 없이 일어났어. 거의 기적이라고 볼 수 있다. 오늘도 인생 노잼 구간을 꾸역꾸역 버텨가며 소설 수정에 박차를 가하는 중이야. 우리도 언젠간 임경선과 요조처럼 채리와 도연의 이름을 걸고 책을 출간할 수 있는 날이 올까? 아직 먼 미래 같지만 그래도 꿈을 꿀 수 있는 것에 희망을 걸고, 자괴감과 싸워가며 수정 작업을 이어가야겠다. 파나마는 지금 새벽일텐데 네가 잠들기 전 답장을 읽을 수 있길 :)
ps. 안 바쁠 때 답장 좀.
연남동에서 도연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