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연에게.
서른여섯에도 여전히 꿈이 있는 건 너무 근사한 일이야. 그리고 이런 표현 진부하지만 꿈을 향해 발걸음을 내딛는다는 건 대단한 일이지. 본업에 종사하며 시간을 쪼개어 꿈을 위해 무언가를 하는 사람 혹은 본업을 때려치우고 본격적으로 새로운 일에 도전하는 사람들에게 우리는 보통 멋있다거나 대단하다고 표현하잖아. 얼마쯤의 존경심을 섞어서. 나는 네가 소설 때문에 얼마쯤의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 한들 네가 꿈을 향해 차곡차곡 내딛고 있는 그 발걸음들이 정말 멋지다고 생각해.
문득 보통의 서른여섯 살의 직장인으로 계속 살았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너도 나도 보통의 사람들이긴 하지만, 너는 연말정산을 5월에 하는 프리랜서인 점과 나는 파나마에서 살고 있는 점이 우리를 메인스트림에서 약간 빗겨 나가게 한다고 치자. 가장 보통의 서른여섯이라면 지금쯤 회사에선 중간관리자쯤이 되어 안정적이고 봉급도 많이 받을 테고 이제 그 정도 짬이면 연차 쓰면서 눈치 같은 것도 안 보겠지?
며칠 전에 내가 회사에서 재직증명서를 떼었는데 '현재 휴직 중인 2년 몇 개월 차 9급 공무원'이라고 써진 종이였어. 고작 2년 몇 개월. 내가 서른한 살에 회사를 그만두고 공무원 시험을 준비할 때 나에게 가장 영향을 미쳤던 사람은 어떤 네덜란드 사람이었어. 네덜란드 거래처에서 엔지니어로 새로 일하게 된 사람이 우리 제품의 기술 교육을 받으러 한국에 왔는데 본인은 엔지니어라는 일을 처음 해본다는 거야. 그럼 그 전에는 무슨 일 했냐고 했더니 금융업에 종사했대.
"와우! 완전 다른 직종이네?? 근데 어떻게 엔지니어가 될 생각을 한 거야?"라고 내가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물었지. 그의 대답은 "인생이 얼마나 긴데 한 가지 직업만 가질 수 있어?"였어. 그러면서 "엔지니어로 내가 얼마나 일 할는지 모르겠지만 아마 나는 몇 년 후엔 또 다른 일을 하고 있을 거야."라더라. 걔네 사장이 들으면 기껏 교육시키러 한국 출장까지 보내 놨더니 저딴 소리나 해??라고 빡칠 수 있을 만한 대답이었어.
회사를 그만두고 공시생이 되어볼까 말까 고민하던 때에 최종 결심을 하게 한 건 그의 대답이었어. 그의 대답이 내 마음 한구석 어딘가에 잘 보관되어 있었던 모양인지 새로운 도전을 고민하던 때에 그의 대답이 툭! 마음속에서 튀어 오르더라고.
'그래! 해외 영업일을 6년 해봤으니까, 이제 공직자의 삶도 살아보자!' 결심하고 바로 사직서를 냈지. 나는 아무래도 본업을 병행하며 도전하는 타입은 아니었는가 봐. 근데 말이야, 내가 결혼하면서 공무원을 휴직하고 파나마로 올 때 같은 과에서 근무하던 선배가 나에게 이러더라?
"채리야, 너 파나마 가면 무슨 일 할 거야?"
"언니! 공무원은 겸직금지잖아요. 다른 일 못하잖아요."
"넌 공무원 그만두고 결국 그곳에서 다른 일을 할 것 같아."
요즘 드라마 '부부의 세계'에서 이런 대사가 나오더라. 한 번 바람피운 놈은 또 피운다고. 선배 언니가 나의 바람기를 알아보기라도 한 걸까. 요즘엔 일하고 싶다는 생각이 자주 들어. 육아를 피하기 위해서라기보다(근데 또 그런 이유는 전혀 아니라고 하기엔 무리가 있는 듯하고) 일에서 얻는 성취감이나 피로감도 좀 느껴보고 싶고 매일 얼굴에 화장품을 찍어 바르고 오늘은 또 뭘 입나 옷장 앞에 서서 고민을 하고 싶어. 아휴, 왜 이렇게 입을 게 없어? 작년 봄엔 대체 뭘 입고 살았지? 오늘 퇴근 후엔 인터넷 쇼핑 좀 해야지, 생각하면서. 남의 돈으로 고기랑 술을 잔뜩 먹는 회식도 빼놓을 수 없지. 당장은 시호 때문에라도 일을 하긴 힘들고 또 아직은 내가 어떤 일을 하고 싶은지도 모르겠어. 그저 일하고 싶다는 마음이 뜬구름처럼 둥둥 떠다닐 뿐이지. 코로나 때문에 너무 집에만 갇혀 지내서 더 이런 마음이 드는지도 몰라. 그렇지만 나는 집에만 있는 게 견디기 힘들고 집안일이 적성에 안 맞는 사람이라 어차피 청소하고 빨래를 해야 한다면 나가서 파출부 일을 하는 게 좋겠어. (ㅋㅋㅋㅋㅋㅋㅋㅋ)
아무래도 한 직종에서 평생을 바쳐 일하는 것만큼 힘들고 위대한 일은 없는 것 같지?
P.S. 시간 날 때 답장 좀.
파나마에서 채리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