뭘 해도 할 놈

-연남동에서 파나마로

by 도연

채리에게


지금 한국은 파란 하늘이 예쁜 봄이 시작되었어. 낮에는 가벼운 티셔츠 차림에도 춥지 않고 저녁에는 외투 하나를 걸쳐도 될 만큼 날씨가 많이 풀렸어. 날리는 꽃가루 덕분에 나의 비염은 시작되었지만 말이야, 그래도 봄은 참으로 예쁜 계절 같아. 나는 사계절을 모두 타는 사람에 속하는데 게 중에도 유난히 봄을 많이 타는 사람이었어. 연말연시 북적거리는 도시에서도 외로움을 잘 느끼지 않지만 유난히 봄이 되면 코가 간질거리고 궁둥이가 들썩 거리는데, 막상 이 봄을 함께 보낼 누군가가 없거나 친구들이 모두 바쁘거나 하면 외로움을 자주 느끼곤 했던 것 같아. 올해 봄은 코로나 바이러스 덕분에 외출이 많지 않고 여행마저 금기시되어버려서 오히려 여행이나, 외출 욕구를 많이 느끼지 못하고 보내고 있단다. 오히려 데이트를 할 때 남자 친구가 뭐할까? 물어보면 '그냥 집에나 있자'라고 할 정도니까 말이야.


난 채리를 보면서 '넌 뭘 해도 할 놈'이라고 생각하곤 했어. 우리가 처음 만나게 된 몽골 여행 때 느꼈지. 함께 여행했던 중호도 마찬가지고 말이야. 저들은 뭘 해도 잘하겠다. 어떻게 살더라도, 어떤 환경이 처해져도 살아남겠다고 말이야. 그래서 네가 힘들게 공부해서 얻게 된 공무원 자리를 박차고 파나마행을 결정한 것도, 우려스럽지 않았어. 너의 그 선배 언니와 나는 아마 같은 마음이었겠지? 나는 그 생활력이라는 것은 꽤나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편이야. 사회에서 제 몫을 하면서 살아가는 일이란 꽤나 평범하지만 어려운 일이거든. 아무리 멋들어진 직업을 가진 이라도 자신이 하는 일이 못마땅하고 사는 게 재미없고, 작은 일에서 오는 성취감과 소박한 행복 따위 느끼지 못한다면 그 어떤 일을 하더라도 불행할 가능성이 높으니까 말이야. 그래서 말인데 네가 농담처럼 말한 가사도우미 일을 하는 것도 나는 찬성이야. 일이란 게 꼭 자신을 비추는 거울일 필요는 없으니까 말이야. 노동에 대한 적당한 임금을 받고 그렇게 번 돈으로 개인의 행복에 소비하며 살아가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형태가 아닐까 싶어.


나의 최측근이 근래 이런 고민을 하더라고. 지금의 직업을 10년을 했는데, 일이 너무 지루하고 싫고, 괴롭고 성취감이 없어서 관두고 싶은데, 그만두고 나면 나이도 많고 백수가 되는 일이 두렵기도 한가 봐. 여태 한 직종에서 오래 일을 했으니 당연히 다른 건 할 줄 아는 것도 없고 경험이 없다. 게다가 되고 싶은 것마저 없어서 자기 자신이 굉장히 '별로'인 인간 같다는 거야. 그래서 내가 이런 말을 해주었어.

"사람은 미래가 불투명할 때에 불행을 느끼잖아. 아무것도 하지 않고 나태하게 살기 위해서 지금 조금 더 고생해보면 어떨까? 현실적으로 몇 년 남지 않은 연금 보험이 끝날 때까지라도 일을 하고, 적게 벌고 적게 쓸 수 있는 시간이 오면 연금 받으면서 살면 어떻겠냐고. 그리고 꿈이 없는 것도 꿈이라 생각한다. 나태하게 사는 삶, 잉여로운 삶이 꿈이 되는 것이 뭐 어때서. 영 견디기가 괴로우면 그만둬버리고 여태 해본 적 없는 여행도 좀 하고, 모아놓은 돈도 다 까먹어 보면서 살아봐라. 그러다 보면 답이 찾아질 거다."라고.

참... 책임지지도 못할 남의 인생에 돌을 던져버렸지. 하지만 곧 알게 되겠지. 어차피 관두고 여행 가고 싶어도 코로나 때문에 최소 6개월은 해외로 뜰 수 없다는 걸. 그러니까 킵 고잉 하자! 란 의미였어. (ㅋㅋㅋ)


소설 수정이 막바지로 접어들었어. 출판사를 찾기 전까진 이제 수정은 그만 하려 해. 그랬더니 갑자기 할 일이 없네? 무료한 하루를 보내고 나니까 갑자기 내가 쓸모없는 인간처럼 느껴져. 그렇다면 역시 나도 너처럼 '일을 못해서 죽은 귀신이 붙은 사람'인 걸까? 이런 감정이 드는 동시에 나는 또 생각해. 난 뭘 해도 할 놈이란 걸 말이야. 굶어 죽을 팔자는 아니라는 걸 너무나 잘 알고 있기에 며칠 쉬고 일어나면 다시 일거리를 찾아 헤매는 한 마리의 하이에나가 되겠지. 30대 중반이 되면 말이야, 안정적인 일과 가정이 만들어질 줄 알았는데 말이지. 인생은 참 뜻하지 않게 다른 방향으로 잘만 흘러가는 것 같구나. 내일도 오늘과 같이 평온하지만 뜻하지 않은 행복들을 많이 발견하는 하루가 되길 바란다.


ps. 안 바쁠 때 답장 좀.

연남동에서 도연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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