뜻하지 않은

-파나마에서 연남동으로

by 강채리

도연에게.



너의 편지 말미에 '뜻하지 않은 행복'이라는 단어를 읽는데 나도 모르게 머릿속에서 '하나 되어'라는 노래가 재생되었어. 뜻하지 않은 아픔을 겪었어~♬ 이렇게 김정민이 부르면, 뒤이어 엄정화가 부르지. 너무 앞만 보며 달렸던 거야~♬

IMF 위기에서 모두 하나 되어 힘내자는 노래였지. 너도 나도 중학교 때 IMF를 처절하게 온몸으로 겪어낸 세대 아니겠니? 나는 IMF 때 아빠가 하시던 일이 망해서 과테말라로 이민까지 가게 되었으니 그야말로 처절하게 IMF를 겪어냈다고 할 수 있겠다. 아무튼 나는 이 노래를 노래방에서 이미 서비스 20분을 두 번이나 받고 마지막 1분이 남았을 때 마지막곡으로 예약해서 친구들끼리 마이크를 돌려가며 부르기를 좋아했어. 노래방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파나마에는 글쎄 말이야 노래방이 없어!! 노래방뿐만 아니라 유흥을 즐길만한 게 많이 없는 편이야. 그래서 이곳은 청춘이 살기엔 퍽 싱겁고 가정이 있는 사람이 살기엔 가정에 충실할 수 있는 구조라고 생각해. 가정을 꾸렸지만 아직 청춘이(라고 생각하)며 술과 음악을 인생의 풍류나 낭만으로 여기는 나로서는 노래방이 없는 게 조금 아쉬운 부분이기도 해. 3차쯤에 노래방에 가서 노래를 부르며 술 좀 깨고 나와서 순댓국집으로 막차를 가서 '딱 한 잔만 더' 하던가, 아니면 노래방에서 맥주를 더 마시면서 아예 더 깊이 취해버리던가 하면, 이 얼마나 완벽한 기승전결이니. 적고 보니 노래방의 역할은 어딘가 전략적인 부분이 있다.


얘기가 잠깐 노래방을 들렀다 왔는데, 내가 하려던 얘기는 '뜻하지 않은 행복'이었어. 한때 소확행이라는 단어가 유행했잖아. 작지만 확실한 행복. 별것 아니지만 나에게 확실하게 행복을 안겨주는 것들. 엽떡에 막걸리를 마시며 영화보기, 샴푸 냄새와 섞인 밥 짓는 냄새, 추적추적 내리는 빗소리를 들으며 읽는 소설책. 아~ 이렇게 나열해서 쓰고 있자니 생각만 했을 뿐인데도 기분 좋은 에너지가 차오르는 느낌이다. 참! 그런데 '소확횡'이라는 단어도 생긴 거 알고 있었어? 작지만 확실한 횡령이래(ㅋㅋㅋㅋㅋㅋㅋㅋㅋ) 회사 커피나 녹차를 몇 개 집에 챙겨간다거나 회사 형광펜이나 포스트잇을 개인적으로 쓰는 그런 것들이지. 진짜 기발하지 않아?? 나는 가끔 댓글 같은 걸 보면 어쩜 이렇게 재치 있는 사람들이 많은지. 감탄한다니까! 소확행의 의미가 나에게 행복감을 주는 확실한 것들, 즉 예상 가능한 행복이라면 뜻하지 않은 행복은 반대로 예상치 못한 행복일 테지. 네가 나에게 뜻하지 않은 행복을 발견하는 하루가 되길 바란다고 해서, 오늘 나는 뜻하지 않은 행복을 찾아봤어.

키우는 화분에 물을 잘 챙겨줬더니 건강한 색을 띠는 작은 잎들이 풍성하게 돋아나 있는 걸 봤을 때, 요 며칠 우리 집 창밖에선 보이지 않던 달이 창문을 열자 아주 예쁜 모습으로 떠있을 때, 어느덧 배밀이를 시작한 시호가 TV를 보는 내 옆까지 기어와 내 옷자락을 잡아당기며 배시시 웃을 때, 매일 집에만 있어 요일 감각이 무감각해졌는데 알고 보니 오늘이 목요일이라 '슬기로운 의사생활'을 볼 수 있을 때! 행운처럼 뜻밖의 행복들을 만났어.

그러고 보니 오늘도 내 주위엔 많은 행복들이 널려있었네. 문득 네가 몽골에서 소원을 빌던 내용이 생각난다. '내 주위의 행복들을 행복인 줄 모르고 지나치지 않게 해 달라고' 빌던 네 기도.


오늘 밤엔 시호를 재우고 소설을 읽을 거야. 수필을 4권 연속 읽었더니 소설이 읽고 싶더라고. 언젠가 너의 소설을 읽을 수 있는 그날이 오겠지? 금방일 거야. 시간이 얼마나 빠른지 벌써 5월이 되었더라고! 언빌리버블이다 진짜. 왜 벌써 5월인 거지? 한국은 황금연휴라던데.. 그래서인지 인스타에 너도나도 여행 간 사진들이 올라와. 해외여행이 막혀서인지 다들 국내 이곳저곳을 다니는데 우리나라 참 근사한 곳 많더라. 너는 지금 어디서 무얼 하고 있니? 기분 좋은 봄 내음 실컷 들이마시고 있니?


p.s. 시간 날 때 답장 좀.

파나마에서 채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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