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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연 Jun 07. 2020

치앙마이에서 바퀴벌레 먹은 썰


치망마이에서의 마지막 아침이다. 일주일 동안 꼬박꼬박 아침마다 조식을 챙겨 먹었다. 치앙마이는 한국보다 2시간이 느려서, 10시에 일어나도 한국시간으로 12시라서 늦어도 9시엔 일어나 조식을 챙겨 먹었다. 그리곤 점심시간을 피해 늦은 점심을 먹고 카페를 가는 패턴을 일주일째 반복했다. 오늘도 어김없이 그 패턴을 반복할 예정이다.

짧은 여행에 나만의 패턴을 만드는 일은 얼마 안 되는 기간이지만 일상의 리듬을 만들 수 있다. 단골집이 생긴다던지 (주인이 날 몰라도 나는 단골) 늘 걷는 거리가 생긴다던지 하는 건 여행 속의 또 다른 즐거움이다.


마지막 날인 오늘, 일을 좀 하기로 했고 친구는 쇼핑을 가기로 했다. 각자의 시간을 보내기로 한 거다.
오늘은 해가질 때까지 아무 데도 나가지 않겠노라 했고, 저녁이 되면 호텔 근처에서 만나기로 했다. 마지막 날이라 그런지 조금 더 널브러져 있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로비에서 일을 조금 하다, 방으로 들어왔다. 역시 에어컨이 최고야 하면서!. 박정민의 쓸만한 인간을 읽다 조금 남은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려고 테라스에 반쯤 걸터 누웠다. 서른을 벌써 사 년이나 지나 보낸 내가 읽어도 울컥하는 문장이었다. 잘-나가는 배우가 지난 서른을 떠올리면 "어두웠어, "라고 말하는 이 대화에서 나중에 내가, 나를 떠올릴 때 어떤 기억을 들춰낼까 라는 상상을 하게 만들었고. 나도 성공할 수 있을 것만 같은 희망을 주는 대화, 꽤 기분 좋았다. 누군가 나에게 "언니의 서른은 어땠나요?"라고 물어온다면 나는 이렇게 답할 것 같다. "꽤나 많이 혼란스러웠지, "라고. 지금 나는 아주 평온하다. 어떤 연애가 나를 뒤흔들더라도, 직업을 잃어도, 돈이 없어도, 나의 주위에서 어떤 폭풍우를 쏟아붓는다 하더라도 나는 흔들리지 않을 자신이 있다. 마음의 중심을 제대로 잘 잡고 있다. 4년 만에 이뤄낸 쾌거다.




치앙마이에서 제일 좋았던 곳이 어디야?라고 묻는다면 재즈클럽!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또 오고 싶었던 곳을 마지막 밤에 다시 찾았다. 제일 좋았던 곳, 다시 꼭 오고 싶었던 곳, 한 번으론 아쉬울 것 같았던 곳. '노스게이트 재즈클럽'이다.


마지막 밤은 완벽했다. 하나만 빼고.


이 말을 쓸까 말까 고민하고 망설였는데 짧고 담백하게 서술하려 한다. 나 같은 피해자를 없애기 위해서...
1. 나는 와인을 마셨다. carafe를 시켰고, 작은 병에 담아 나왔다.
2. 와인잔은 손에, 작은 병은 바닥에 내려놨다.
3. 음악이 흥겨웠고 오늘은 조금 취해야겠다 생각했다.
4. 어느 순간 와인맛이 묘하게 달라진 걸 느꼈지만 큰 의심 없이 마셨다.
5. 마지막 잔을 마시고 컵을 봤다.
엄청 큰 바퀴벌레가 들어있었다....

여기까지..... 다들, 바닥에 술 놓아두지 마시길....


완벽할 뻔했던 마지막 밤을 바퀴벌레의 액기스를 먹고 마무리 한 나는, 비위가 약한 친구에게 이 사실을 알리지 못했다. 우린 재즈클럽에 갔다가 국수를 먹으러 가기로 했기 때문에, 이 말을 하면 국수조차 못 먹을 것 같은 생각에, 마지막 밤을 망치고 싶지 않았다. 국수를 한 그릇 후루 룹 다 먹고 난 후, 친구에게 말을 해줬다. 


속이 좋지 않았다. 괜찮은 척했지만 머릿속엔 온통 바퀴벌레 생각뿐이었기 때문이다. 아침에 일어나서도 토할 것 같았다. 양치를 하면서도 내 입에 락스라도 뿌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속이 메스껍고 자꾸 토할 것 같아서 조식도 안 넘어갔다. 커피만 조금 마셨다. 나의 이 힐링여행이었던 치앙마이가 로맨스에서 블랙코미디로 바뀌는 마지막 밤이었다. 역시 이놈의 시트콤 인생...

마지막 포스팅에 ㅈㄴ 멋있게 나는 그를 잊었다.. 뭐 이딴 감성 글을 써 갈기려 했지만 바퀴벌레로 마무리하게 만들다니 아니 뭔가 난 이제 다 이겨낼 수 있을 것만 같다. 바퀴벌레 우려낸 와인도 먹은 판에, 뭘 못하겠나.

아무튼 당분간 키스는 안 해야겠다. (할 사람이 없는 건 아니냐..ㅋㅋ...)









여행 끝.
(바퀴벌레 얘기하고 나니 글도 쓰기 싫어졌으니 에필로그에서 만나요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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