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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연 Dec 02. 2020

파나마와 연남동에서의 마지막 펜팔

어쩌면 마지막 연남동에서

채리에게


안녕? 답장 많이 늦었네.

오늘의 나는 연남동이야. 결혼을 한 후로는 주말 부부가 되어서 금요일 저녁부터 인제에 머무르다 월요일 아침에 서울로 돌아오고 있어. 답장을 미루는 한 달 동안 특별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하루하루를 바쁘게 보내다 보니 편지를 차일피일 미루게 되었지 뭐야. 그 좋아하는 책도 읽지 못했고 글도 쓰지 못했고... 또 뭘 못했더라... 아무튼 요즘은 바뀌어가는 나의 가족관계와 건강보험, 인터넷 가족 결합 같은 것들이 모두 바뀌는 시점이야. 새로운 가족을 맞이하느라 친구들에게 안부 한번 묻기도 버거운 일상이었던 것 같아. 


우선 인제 집을 왔다 갔다 하면서 잡초를 뽑고, 집 청소도 하고, 빈집으로 방치되었던 바람에 고장 났던 보일러도 고치고, 시뻘건 고추장 색깔이었던 싱크대에 시트지를 발라 흰색으로 바꾸고, 집구석구석 줄자를 들고 다니며 수치를 재어 꼭 맞는 가구를 고르고 있어. 저렴한 것과 비싼데 예쁜 것 중에서 내적 갈등을 일으키며 그 둘의 중간쯤 되는 것들로 하나씩 주문하는 중이야. 아직 집에는 침대도 없고 식탁도 없어서 캠핑의자와 테이블을 깔고 밥도 먹고 그러고 지낸단다. "라떼는 말이야... 이불 한 채 들고 아무것도 없이 시작했어."라고 하는 어른들의 말처럼 신혼을 시작하는 중이란다.


한달이나 지난 일이지만, 남편한테 프로포즈 받은 날 이야길 해줄게. 그날은 내 생일이었고, 인제집에서 처음으로 하룻밤을 같이 보내기로 한 날이었어. 생일 전날, 내가 엄청 아끼는.. 분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비보를 받고 다음 날, 생일 당일 부산까지 비행기를 타고 다녀왔지. 장례식에서 한껏 눈물을 쏟고 김해공항에 도착했는데 위경련이 와서 배를 잡고 데굴데굴 굴렀어. 119가 오고 난리가 아니었어. 여자저차 해서 비행기를 탔고 서울로 돌아와 24시간 병원을 찾아 주사를 맞고, 또 다시 강원도로... 집에 오니 새벽 3시. '진이 빠진다' 라는 문장의 의미를 온 몸으로 와닿은 하루랄까... 생일이고 뭐고 그냥 따뜻하게 한숨 자고 싶었지. 


그리곤 강원도 집에 들어서는데, 글쎄 거실에 풍선이며 LED로 된 초에... 무슨 당신을 사랑합니다. 뭐 이런 말도 안되는 클리셰 범벅의 현수막이 걸려 있고.. 그 현수막 끝엔 인조 장미 꽃잎으로 만든 하트.. 그 속에 있던 반지 케이스. (잠깐 웃을께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이런 말을 하면 나는 참 나쁜년 같겠지만, 나는 태어나서 단 한번도 이런 프로포즈를 받을거라 예상 못했고 이런 프로포즈만은 받고 싶지 않았거든. 그런데 참 웃긴게 이걸 보는데 웃음과 눈물이 동시에 터지더라? 인터넷에 파는 프로포즈 셋트를 검색해서, 전날 강원도까지 차를 타고 와서 이걸 세팅해놓고 다시 서울로 돌아와서 다음날 나랑 부산을 다녀온 남자. 그것도 다리가 다 낫지 않아서 절뚝 절뚝 거리면서 풍선을 창문에 붙였을 생각을 하니까 너무 귀여운거야. 부산으로 다녀오는 차비만 30만원을 넘게 쓰는데도 한마디도 투덜거리지 않는 사람. 나름대로 준비해놓은 프로포즈 계획이 엉망이 되었는데도 내색한번을 안하는 이 남자가 진짜 내 남편이 되었구나. 내 사람이구나. 이런 마음이 들어서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더라고. 남편이란 이런 걸까... 안정감이란 이런 걸까, 하고 말이야. 


스무살부터 지금까지 여러번의 연애를 해왔지만, 이렇게 내 마음이 편하고 안정감이 드는 때가 처음인지라 한껏 긴장하고 있던 내면이 마구 풀어헤쳐지는 기분. 뭐라 표현해얄지 모르겠지만 어쨋거나 내가 이제 진짜 결혼을 했구나. 라는 걸 실감한 하루였어. 


채리도 지금쯤 과테말라의 새로운 집에 적응을 하고 있을까? 아니면 파나마에서 새로 사귄 친구들에게 작별인사를 하며 파나마의 추억을 정리하고 있니? 새롭게, 아니 어쩌면 다시 돌아가는 과테말라에서의 삶은 너에게 어떤 변화를 가져다줄지 궁금하구나. ㅎㅎ 그곳에서도 여전히 일상은 비슷하겠지만 코로나 때문에 답답하게만 지내던 파나마의 생활보다는 조금 더 여유롭고 자유로워지길 바라. 


한국은 다시 코로나 감염자가 500명대를 넘게 치솟고 있어. 네게 마지막 편지를 쓰는 한 달 전까지만 해도 희망적이었거든. 내년쯤이면 파나마로 가는 비행기를 탈 수 있을까 기대를 품었는데 그 기대가 물거품이 되는 듯해서 착잡하구나.. 여하튼 언제가 될 진 모르겠지만, 이 집을 떠나기 전까지 채리와 다니엘 오빠, 그리고 시호가 놀러 올 때를 생각하며 강원도 집을 꾸미고 있어야겠어. 참고로 나의 강원도 집에선 고개를 올려 보지 않아도 별이 쏟아지고, 아침에 일어나면 호수 위로 물안개가 피어오르는 아주 낭만적인 풍경을 가졌어. 네가 오면 너무 좋아할 것 같아. 당장에라도 커피 한잔과 책을 들고 창가에 앉을 것만 같은. :)


무서운 소식이 많은 이 곳에서도, 그리고 그곳에서도 언제나 너의 가족이 안녕하길 바라면서,

나와 내 남편의 결혼사진을 첨부하여 어쩌면 연남동에서의 마지막 편지를 보낸다. 

(다음엔 인제에서 쓸 것 같거든 찡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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