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에서 과테말라로
채리에게
하이루 채리. 연초부터 시작했던 디자인 교재 작업을 드디어 탈고하고 살짝 여유가 찾아온 화요일이야. 보내야 되는 대본도 일단락되어서 에세이도 좀 쓰고, 읽고 싶은 책을 실컷 읽어야지 생각하고 있어.
네가 보내준 0세부터 100세까지 요약본을 읽곤 이런저런 생각에 빠지곤 했는데 책에서 제시한 내용이 그 나이에 대한 가이드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대체적으로 그 시기에 배워야 할, 배우게 될 이야기인 것 같았어. 몇 가지 얘길 해보자면 우선 6세에 나는 아침 7시에 일어나는 법을 배우지 못했나 봐. (ㅋㅋㅋ) 엄마가 잠이 많으셨거든, 학창시절엔 내내 늦잠을 자는 바람에 지각을 밥먹듯이 했고, 조금 더 자유로워진 고등학교 때까지는 잠을 자느라 학교도 못 간 날이 수두룩 했거든. 반항을 하느라 학교를 안 간 게 아니라 진짜 못 일어나서 못 갔던 나... 그리고 서른 살쯤 되어선 행복은 상대적이란 걸 배운다고 했지. 행복은 상대적이란 말을 어떻게 해석해야 책 내용과 흡사할지는 모르겠지만, 관계 속에 있다고 나는 해석했어. 나 혼자서는 절대 행복할 수 없는 것. 서른 살 쯔음엔 사람과의 관계에 대한 고민이 많은 시기였거든.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어떤 밸런스를 유지해야 스스로 행복을 영위할 수 있는 가 고민이 많았던 것 같아. 그리고 누군가를 잃기 시작하는 40대. 그리고 이루어지지 않은 꿈을 알게 되는 50대. 하지만 그 모든 게 소중했던 60대까지. 짧은 글이었지만 네가 전해준 글은 아주 좋았다!
너의 서른일곱은 어떻니? 나의 서른일곱의 키워드를 꼽자면 음- 내 삶을 지키는 일을 배우는 시기 같아. 어렵사리 만들어 놓은 내 삶의 가치관과 소중한 사람들을 지켜내는 시기 말이야. 이 상황 속에서 내가 너무 잘하려고 해도 독이 되고, 또 너무 방관해도 멀어지고, 역시나 밸런스를 유지하는 일이 어렵고 힘에 부치고 그래. 어떨 땐 일이 너무 중요하니까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다가도, 또 어떤 날엔 소중한 사람들에겐 무리해서라도 시간을 내고 일을 뒷전으로 미루기도 해야 한다고. 뭐 그런 고민들이 많아. 그러니까 이 많은 관계와, 생활과, 일과, 가족들 사이에서 내 가치관, 내 인품, 나의 행동 하나하나를 나 답게 해내는 일 말이야. 정말 그러고 싶다.
아무쪼록 우리 건강한, 후회 없는, 지나고 나면 모두 소중한 그런 서른일곱을 보내자꾸나.
강원도에도 여름이 찾아왔어. 낮이 되면 얼굴이 발갛게 달아오른 만큼 덥고, 비는 수시로 많이 많이 내려주고 있어. 덕분에 비가 그치고 해가 뜨면 풀이 눈에 띄게 잘 자라. 텃밭에 심은 상추며 쑥갓, 깻잎은 이제 손바닥 크기를 훨씬 넘을 정도로 징그럽게 커지고 있어. 그런데 잡초는 텃밭 야채보다 3배 정도는 더 잘 자라서 어느덧 내 허리까지 오는 놈들도 있으니, 매일매일 잡초를 뜯고 풀을 베는 일을 하고 있단다. 일을 하다 한 시간쯤 머리도 식힐 겸 집 마당 관리를 하는데 어쩜.... 이렇게 티 안 나기 있냐고.... 그래도 딸기와 앵두가 빨갛게 익었고 아침엔 치커리를 따고 산딸기로 샐러드를 해 먹는 시간을 보내고 있으니, 난 지금 참 행복한 것 같아.
오늘도 시호는 작은 몸으로 아장아장 걸으며 공원에서 형아들 노는 거 따라 하며 그렇게 지내고 있으려나?
예전보다 편지의 횟수가 줄었지만 그래도 가끔 이렇게 너 사는 얘기, 나 사는 얘기 카톡으론 다 못하는 얘기 할 수 있음에 오늘도 감사하다. (그러니 빠른 답장 부탁 ㅋ)
그럼 오늘도 힘내서 시호의 밥을 하도록! :)
ps. 여름이 오는 어느 날 저녁, 강원도의 불타는 노을을 첨부할게.
시간 날 때 답장 좀.
강원도에서 도연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