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무 번째 이사
이사와 거주지에 대한 이야기를 쓰려고 마음먹게 된 건 단순히 이사만 많이 해본 게 아니라 다양한 주거형태를 경험했기 때문이다. 20살까지는 부모님과, 그리고 21살에 대학을 다니면서는 언니와 함께 자취를 했다. 그리고 언니가 서울에 먼저 취업하면서 처음으로 과 동기 2명과 동거 생활을 시작했다. 개 한 마리, 고양이 한 마리까지 총 다섯 식구의 원룸 생활을 시작으로 한해 뒤, 언니를 따라 나도 서울에 취업을 준비하면서 서울로 향했다. 신월동은 서울에 갓 상경한 나와 친구 둘이 함께 살았던 서울의 첫 집이었다. 첫인상이 사람의 모든 이미지를 결정짓는 것처럼. 나에게 서울은 오랫동안 야박했다. 비가 오면 작은 방에 한쪽 벽은 곰팡이로 가득 찼고, 화장실엔 곱등이가 뛰어다녔다. 알루미늄으로 된 얇은 현관문을 열고 지하로 내려와 일자로 쭉 뻗은 복도로 된 집 구조. 영화 기생충의 집 구조와 완벽히 일치했다. 눅눅한 오래된 장판, MDF로 된 큐브 모양의 책장을 겹겹이 쌓아 올려 친구들은 옷장을 만들었고 큰 방 하나에서 우리 셋은 늘 같이 먹고 잠도 같이 잤다. 이 집은 친구의 친척이 소유한 건물의 빈 공실이라 무료로 사용할 수 있었지만, 반지하의 우울함을 견디지 못하고 셋다 모두 취업에 성공하고는 복층 오피스텔로 이사를 했다. 그 당시 한 해전, 서울로 취업을 하고 신림에 살던 친언니까지 합세하게 되어 총 여자 4명이 그 오피스텔에 살게 되었다. 자취생이라면 한 번쯤 꿈꾸는 무려 복층 구조의 깔끔하고 예쁜 오피스텔이었다. 하지만 거기에서도 여자 네 명에, 개 한마리까지. 깔끔한 친구들과 언니 덕분에 집은 늘 깨끗했지만 어쩐지 복잡한 기분이다. 오롯이 내 공간이 단 한 평도 없던 집. 오류역이 1분 거리에 있어 지하철이 나가고 들어올 때면 진동이 느껴지던 집. 전철이 끊어지는 자정이 되어서야 진동 없이 하루를 보낼 수 있는 오묘한 집이었다.
그리고 2년. 2년을 꼬박 채워 같이 산 우리들은 2명의 친구는 강남으로, 언니와 나는 사당동으로 이사를 했다. 그런데 사당동에 이사를 가서도 언니 친구 한 명이 함께 살아 이번에도 여자 세명이 함께 살았다. 여기까지만 얘기했는데도 숨이 헉헉 차오른다. 지방에서 서울로 상경한 여자들, 옹기종기 모여 살며 사회초년생의 설움들을 그렇게 버텨냈다. 하지만 결국 사당동에서도 얼마 살지 못했고, 서울에 끝내 적응하지 못한 채, 서른이 넘도록 이리저리 주거지를 옮겨 다니며 방황을 했다. 10년이 지난 지금도 그때가 유쾌하고 풋풋한 사회 초년생의 우당탕 생존기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우울하고 쾌쾌하고, 궁상맞고 초라하다. 서울의 첫 집에선 내 모든 소지품과 옷과 머리에서 늘 지하 냄새가 따라다녔으며, 고작 오피스텔 월세 45만 원은 부담스럽고 아까워 네 명이 나눠내면서 그것마저 힘들었다는 사실이, 그때의 감정이, 절박함이 아직까지도 눈만 감으면 떠오른다. 신발에 붙은 구질구질한 껌딱지 마냥 기억에서 떨어질 생각을 않는다. 영화 기생충을 보는데 신월동 집이 떠올랐다. 영화를 보고 나와 걷는 길동안 내 처지가 마치 10년 전, 그날로 돌아간 것 같아 참담한 기분을 씻어낼 수가 없었다. 나는 크면서 아빠를 원망하지 않았다. 이해하려 하지도 않았고, 그냥 폭력적이었던 아빠랑 같이 살지 않아서 좋다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서울 살이를 하고, 신용불량자가 된 내 처지가 밑바닥인 것 같아서 나는 그 시절쯤부터 아빠를 원망하기 시작했다. 어쩌면 그 시절엔 누구라도 원망하고 미워해야지만 살아갈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친구에게 호감을 살 생각은 접고 친구로부터 고립되어도 좋다고 마음먹고 자신을 관철해 가면 진정한 의미에서 모두를 기쁘게 하는 사람이 될 수 있다.
_오카모토 다로,[내 안에 독을 품고]중에서
나와 함께 살았던 모든 동거인들은 나를 탐탁지 않아했다. 처음으로 함께 살았던 대학 동기들은 꼭지를 돌보지 않고 술을 퍼마시느라 집에 매일 안 들어오는 나를 싫어했다. 그때의 나는 나도 싫으니까. 그때를 떠올리면 그저 그들에게 미안한 마음뿐이다. 그리고 다음 나의 절친 룸메이트들도 역시 나와 함께 사는 일을 좋아하지 않았다. 음식을 먹으면 바로 설거지를 하지 않는 건 기본이고, 움직이는 걸음걸음마다 흔적이 고스란히 남는 타입이니, 절친만 아니었다면 2년이 아니라 2달도 못 버티고 이별을 고했을 거다. 그땐 회사 일도 너무 바빠서 야근으로 지쳐 새벽에 들어오고, 또 다음날 눈을 뜨면 회사로 가고, 주말엔 내내 드러누워 시체처럼 하루를 보내길 반복했으니 매일 퇴근 후에 가벼운 운동을 하고 회사에 도시락까지 챙겨 다니는 친구들은 내가 얼마나 한심해 보였을까 싶다. 언니는 내 생활습관은 포기를 해버려 이젠 잔소리마저 하지 않는 수준이었으니 언니가 결혼을 하는 30살까지 나를 '데리고'살아 주었다. 나는 항상 지저분하고 더러운 캐릭터, 코를 골아 같이 잠을 자는 사람을 피곤하게 하는 사람, 책임감이 없고 지만 생각하는 이기적인 동거인. 그렇게 그 친구들에게 기억되었을 게 분명하다. 그리곤 어찌어찌 서른이 넘었다. 언니는 결혼을 했고, 나는 본격 혼자 살이를 시작했다. 내 방이 생기고, 온전한 내 생활을 하고, 그리고 나의 마지막 동거녀였던 민철이와 4년을 함께 살며 뒤늦게 깨달았다. 동거를 하려거든 내 방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외로움의 명약은 '외로움'이다. 가장 큰 '혼자'로 살 수 있을 때 혼자인 자신에게 성실할 수 있다.
_노명우 [혼자 산다는 것에 대하여] 중에서
오롯이 혼자만 지내는 시간을 29살에 드디어 처음 가졌다. 그동안 늘 언니, 친구들, 대학 동기들과 함께 살았으니까 나는 나만의 삶을 패턴을 몰랐고, 친구들이 설거지를 하라고 하면 하고, 밥을 해주면 먹었다. 주말엔 늦잠을 늘어지게 자고 싶지만 친구들은 벌써부터 일어나 외출 준비를 했고 늦게까지 티브이를 보고 싶어도 그럴 수 없었다. 누군가와 같이 사는 일은 불편함 투성이었다. 그래서 처음으로 오롯이 혼자 지내게 된 1년은 너무 좋았다. 내가 밥을 먹고 싶을 때에 먹을 수 있고, 설거지를 잔뜩 쌓아놓아도 뭐라 하는 사람이 없었다. 당시 1인가구 예능프로그램도 인기였다. 혼자 사는 삶에 관심이 높아지면서, 혼자 살아도 잘 살아야겠다고 생각하면서 요리도 시작했다. 혼자 사는 삶에 관한 책을 읽고, 고독을 찬양하면서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 드럼 세탁기가 고장이 났다. 이불빨래를 돌리다 드럼세탁기가 멈춰버린 거다. 문이 열리더니 세탁기 속에 들어있던 물이 다 쏟아져 나왔다. 물과 세제가 범벅이 된 방에서 참담함을 느꼈다. 하루종일 걸레질을 하고 축축 젖은 이불을 들고 지인 집에 가서 탈수를 부탁했다. (코인 빨래방 만세다 정말. 그땐 동네마다 코인 빨래방이 흔하게 없을 때였다.) 그리고 얼마 안가 보일러도 고장이 났다. 집은 정말 추웠다. 패딩을 입고 손에 장갑을 끼고 생활했다. 창문이 제대로 닫히지 않아 블라인드를 샀는데 블라인드를 제대로 못 달았는지 자꾸만 천정에서 블라인드가 떨어졌다. 블라인드가 세 번째쯤 떨어지던 날 저녁. 나는 엉엉 울어버렸다. 혼자 사는 게 너무 힘들어서. 외로워서. 처량해서. 인생이 참 만만치가 않아서.
그렇게 처음으로 독립을 해 혼자 살던 원룸 계약이 만료되고, 통영으로 향했다. 더 철저하게 혼자가 되기로 결심했다. 이깟 외로움, 코웃음 칠 수 있도록 더더욱 고독해지려고. 나는 믿고 있었다. 내가 혼자 보낸 시간들이 좋은 에너지가 되어 다시 나에게로 돌아온다는 분명한 사실을.
그렇게 또 2년이 흘렀다.
나는 다시 서울로 돌아왔고, 다시 누군가와 함께 사는 일을 선택했고, 합정동에서 10년 동안 혼자 살고 있던 민철이와 동거를 시작했다. 민철이와 함께 살기로 결심한 이유는 우리 둘 다, 마포구를 찬양하는 '마포구 러버'였으며, 둘 다 혼자 산 구력이 좀 되는 두 사람이었기 때문에 지금이라면, 서로를 미워하지 않고 좋은 동거인으로 남을 수 있을 거란 묘한 자신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혹시 우리 둘 월세를 합치면 방도 따로 있고 거실이 있는 넓은 집에서 살 수 있는데, 같이 사는 건 어때?
-그렇지 않아도 서울로 네가 다시 돌아오는 거라면, 같이 살아볼까 하고 물어보려 했었어, 잘됐다.
그렇게 우리는 같이 살림을 합쳤다. 방은 물론 2개 이상으로, 같이 식사를 할 수 있는 거실이 있는 집으로. 그렇게 그녀와 함께 4년을 살았다. 혼자서도 잘 살아왔는데, 이제 우린 서로가 없는 밤이 긴장되는 지경이 되었다. 내가 여행을 다녀오면 문배우는 내가 없어 무서워서 창문도 못 열고 지냈다고 말한다. 친구와 함께 살며 제일 좋은 순간은 아무리 생각해도 집에 혼자 있을 때, 함께 밥을 먹을 때, 아침에 일어나 굿모닝 인사를 할 때도 좋지만, 새벽에도 긴장을 하지 않고 편하게 잠이 드는 것이 참 좋다. 두려움이 사라지고 외로움이 끼어들 틈이 없어 불필요한 감정 소모를 하지 않을 수 있는 것도 너~무 좋다. 혼자 술을 마시고 영화를 보면서 궁상을 떠는 걸 좋아하는데, 동거를 하면서도 우리는 각자의 방에서 혼술을 하고 혼자 영화를 봤다. 외롭지 않은 마음으로 혼자의 시간을 즐기도록, 서로의 시간과 공간을 방해하지 않았다. 이 전에 문제가 되었던 지저분한 습관들은 어떻게 되었냐고? 물론 그 부분은 완벽히 개선되지 않았다. 여전히 나는 밥을 먹고 곧바로 설거지를 하는 부지런함은 장착하지 못했고 민철이는 식사 후에 곧바로 설거지를 하는 유형의 사람이었다. 하지만 민철이는 불평 없이 설거지를 해주었고, 나는 미안함과 고마움에 늘 그녀가 먹을 반찬을 하고, 밥을 해주었다. 민철이와 내가 둘 다 바쁠 때는 가사도우미 서비스를 불러 가사 노동을 온전히 민철이에게만 떠맡기지 않았다. 서로에게 장점과 단점이 있었지만 우린 그것을 서로 잘 조율하며 지냈다. 이 얼마나 이상적이며 아름다운 관계인가! 민철이와 나의 동거 스토리는 책 한 권을 다 채울 수도 있을 정도로 할 말이 많지만, 아무래도 여기까지.
혼자 사는 일은 좋다. 한 인간으로서 스스로 생각할 시간과 공간을 가지게 된 건, 분명 행복이었다. 하지만 그 시간을 가지고 난 후 잘 맞는 친구와 함께 사는 일은 두배로 더 행복했다. 하지만 그건 각자의 방이 있을 때 얘기다. 20대의 동거 생활도 각자의 방만 있었더라면 더 잘 지낼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생각도 한다. 뭐 그땐, 지금만큼 벌이도 좋지 못했고, 마음도 몹시 가난했으니까 서로가 피해자였던 걸로 생각하려 한다.
그리고 결혼을 했다. 이번엔 남자와 함께 산다. 동거(?) 1년째. 아직까지는(?) 좋다. 같이 살길 잘-했다는 생각을 한다. 흔히들 하는 말이지만 '혼자'서도 잘 살아야 '둘이서'도 잘 산다는 말은 정말 맞다. 집이, 동네가 사람 때문에 좋아지는 경험을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친구와 함께 사는 일은 좋은 일이다. 하지만 둘이 살려거든 각방은 꼭 쓰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