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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연 Oct 15. 2021

어른이 하는 일 <시골집 계약하기>

스무 번째 이사

계약서를  쓰던 날

스물아홉에 언니가 결혼을 하고 처음으로 '제대로 혼자' 살면서 이사라는 건 어른이 하는 일이란 걸 알게 되었다. 임대차 계약서에 도장을 찍으면서, 큰돈을 보증금으로 송금하면서, 거친 용달 기사와 이삿짐센터 사람을 상대하면서 나는 어른이 되어야 했다. 살면서 돈이 없어서 좌절한 적이 거의 없지만 대출을 받으러 은행을 갔다가 거절을 당하고 돌아오던 몇 번의 기억 때문에 이사를 앞두고서는 어쩐지 의기소침해지곤 한다. 사회에서 쓸모없는 부류의 인간이 된 것 같은 기분, 열심히 살았지만 인정받지 못하는 기분. 여태 해왔던 내 노력과 경험들이 사람들의 손에서 쓸모없이 버려지는 거리의 전단지 조각쯤이 된 듯한 기분, 그런 부스럭거리는 쓰레기가 된 것 같은 기분이 싫다. 현실적인 문제들을 직면하면 내 마음은 어린아이이거나 상처 받은 여자이거나 시인이거나... 그런 것 따위는 집어치우고 어른이 되어야만 했다. 어른. 불안한 마음일랑 저 깊숙한 곳에 밀어 넣고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어른. 그렇게 은행과 부동산을 드나들며 이사를 끝내는 때까지 어른으로 잘-버텨야 한다. 


우리가 살기로 결정한 집은 매매로 나온 매물이었다. 돈은 없지만 집을 너무 마음에 들어 하는 우리가 짠 했던 건지, 아니면 산속에 골치 아픈 매물을 빨리 처리해버리고 싶었던 건지 알 수 없지만 부동산 업자는 건물주에게 1억에 전세 계약으로 바꿔주었다. 원하던 저렴한 월세는 아니었지만 이 궁궐 같은 집에서 살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꿈만 같았다. 둘이 부둥켜안고 잘 살기로 약속까지 하고 서울로 돌아오는 차 안, 둘은 또 말이 없어졌다. 우리가 가진 돈을 모두 합해도 1억이 안되니까... 당시 내 통장엔 천만 원도 없었다. 서른여섯에 가진 게 천만 원도 없는 나란 인간, 매번 이사를 할 때마다 느끼는 감정을 또다시 느끼고 있었다. 지금의 남편, 그때의 남자 친구, 그를 만나기 전까지 결혼 생각도 없었지만 결혼 생각이 있다고 한들 남자 친구도 없는데 결혼을 위해서 돈을 모으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 하고 살았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차에서 갑자기 끊었던 담배까지 피우며 여태까지 살면서 썼던 술값이 너무 아깝다고 한다. 스트레스라곤 안 받는 타입의 무념무상의 남자가 저렇게까지 스트레스받는 걸 보니 마음도 아프고, 도움을 줄 수 없는 것도 미안하니, 얼른 집에 가서 술이나 한잔 해야겠다고 생각한다. 나도 참, 철이 들려면 멀었다 멀었어.


부동산 업자는 또다시 집주인과 협의해 전세 가격을 8천만 원으로 조정해주었고, 전세대출 까지도 승인해주었다. 생각보다 일은 일사천리로 이루어졌다. 이사를 수 없이 하며 깨달은 교훈 하나를 다시 상기시켜보자면 '대가 없는 호의는 없다' 였는데, 뭐든지 오케이 하며 중재를 잘해주는 업자가 조금 의심스럽긴 했지만 별생각 없이 넘어갔다. 마지막으로 대출만 잘 된다면, 이 모든 게 끝이 난다! 신혼부부 전세 대출을 신청하려면 청첩장이나 우리는 법적으로도 부부라고 증명하는 가족관계 증명서가 있어야 했다. 우리는 결혼식을 생략하기로 했으니 청첩장은 당연히 없고, 우리가 결혼할 관계라는 걸 증명할 수 있는 어떤 서류도 없었다. 그래서 혼인신고를 급하게 하게 됐다. 같이 살 집도 없고, 부모님께 인사한 지 일주일 만에 혼인신고를 하게 되다니... 최근에 본 드라마의 대사가 떠오른다.

 

"결혼을 하려면 아파트가 있어야 하는데 아파트가 있으려면 결혼을 해야 한다는 게 말이 되냐?" - 드라마 <월간 집> 中


순서가 참 이상하다. 같이 살 집도 없는 상태에서 혼인신고를 먼저 해야 하는 셈. 이상한 순서는 이뿐만 아니다. 대출을 받으려면 임대차 계약서가 필요하다. 그런데 만에 하나라도 계약을 했는데 대출이 안 나온다면? 이런 불안함을 떠안고 계약을 먼저 실행해야 한다. 전세대출은 사람이 아닌, 집이 보증이 되기 때문에 가능하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이 모든 게 처음인 우리는 모든 게 다 불안했다. 20대는 정부 학자금 대출 덕에 대학교 4학년부터 신용불량자로 살았다. 내 이름으로 신용카드도, 휴대폰 계약도 할 수 없었다. 서른이 넘어서야 대출을 다 갚았다. 쓰고 갚고를 반복한 덕에 신용등급 1등급이 되었는데도 금융기관에 신용불량 이력이 남아 영원히 날 괴롭힐 거란 자격지심이 생겨났다. 남편과 나 둘 다 고정급여가 없는 프리랜서라는 점도 불안함의 요인이었지만, 불안한 눈빛은 거둬두고 그만, 어른이 되자. 정신을 바짝 차려야 했다.


드디어 계약을 하는 날. 부동산 업자는 어쩐 일인지, 아침에 자신의 집으로 오라고 했다. 집에서 과일도 먹고 공들여지었다는 집을 실컷 구경시킨 다음 수수료 이야길 꺼냈다.

"수수료는 백만 원은 줘야 해, 알지? 못해도 0.9%는 줘야 하는 거."

이사를 수없이 다녀도 전세계약은 처음이라 수수료가 정확히 얼만지 몰라서 슬쩍 검색을 했다. 토지의 경우 수수료 0.9%. 주택의 경우 0.3%~0.4%* 그러니까 정확히 우리가 지불해야 하는 금액은 30만 원. 100만 원을 달라는 건 말이 안 되는 요구였다. 귀촌 카페에 문의를 하고, 여기저기 물어보니 시골은 다들 웃돈을 요구한다는 거다. 너무 과하다 싶으면 구청에 신고하라고 하는데 우리의 첫 번째 집, 시작하는 날, 소란은 피우고 싶지 않아 남편과 상의해서 70만 원만 보내기로 합의했다. 사기를 당할 뻔한 것이지만, 전세금도 낮춰주고 어쨌든 아저씨 덕분에 우리가 이렇게 좋은 집을 구할 수 있었으니 해프닝으로 넘기자는 마음이었다. 역시 대가 없는 호의는 없었다 무릎을 탁 치며 수수료까지 협의를 한 뒤, 계약서를 쓰러 나섰다. 그런데 우리를 부동산이 아닌 다른 길로 데려간다. 슬슬 불안해졌다. 우리가 도착한 곳은 읍내에 있는 법무사였다. 집주인은 연세가 지긋하신 어르신이었고 법무사의 직원쯤 되는 여자분에게 부동산 업자는 '우리가 계약서를 쓰려고 한다. 등기부 등본, 건축물대장과 계약서를 좀 뽑아달라' 한다. 그리곤 직원이 이 건물의 소유주, 건축물에 대한 설명 해주었다. 기분이 또 쎄- 했다. 부동산에서 계약서를 작성하는 게 아니라니... 임대차 계약서는 또 왜 이렇게 얇은 건지... 빠진 내용이 있는지 살펴보려 해도 도통 눈에도 들어오지 않고 부동산 업자는 빨리 도장을 찍고 계약금을 보내라고 윽박질렀다. 마음이 초조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집주인이라고 온 사람의 신분증과 주민번호, 그리고 등기부 등본에 기입되어 있는 번호를 대조하는 것. 다행히 신분은 확실해 보였고 은행과 연결이 되어 있으니 나쁜 일은 일어나질 않길 바라며 도장을 찍었다. 집으로 돌아가며 알게 된 사실이지만 부동산 아저씨가 서둘렀던 건, 송어회를 먹으러 가야 하기 때문... 이란다. 헛웃음이 났다. 정말 이렇게 허술하게 전세계약이 돼버린 건지. 임대차 계약서를 들고 은행으로 가 대출을 마무리 지었다. 결혼 전 무릎 수술을 했던 남편은 깁스를 하고 있었는데, 내가 서울에서 일을 하는 동안 계약과 대출 때문에 인제를 수 없이 왕복했고 고생을 꽤 많이 했다. 그렇게 이 집이 2년 동안 살 우리 집이 되었다.


전입 신고를 하러 간 날, 행정복지센터의 직원이 묻는다.


"이 골짜기에 집을 어떻게 알아보시고 이사를 하셨어요?"

"부동산에서 알아봤죠^^"

"네? 저희 마을엔 부동산이 없는데요..."


두둥, 식스센스 급의 반전!!! 이제야 그 모든 궁금증이 풀렸다. 백발의 부동산 업자는 공인중개사가 아니었고, 그냥 동네 아저씨... 였던 것이다. 그래서 계약을 법무사에서 진행한 것이고 수수료도 마음대로 불러버린 것. 아직까지도 우리가 들어갔던 부동산 문은 굳게 닫혀있다. 지금 생각해보면 너무 웃픈 이야기지만, 그래도 고마웠다. 이렇게 좋은 집에서 살 수 있게 해 주어서. 늘 그렇듯 이사를 온 뒤 촌스러운 황금색의 문고리를 하얀색으로 갈았고, 와인색 싱크대에 하얀색 시트지를 붙였다. 거실 조명을 갈고 커튼을 달았다. 그렇게 강원도 산속 새소리에 눈을 뜨는 이곳은 나의 공간이 되었다.






*¹부동산 수수료를 정확히 알아보려면 부동산 중개보수 계산기를 이용하면 편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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